혹여나 온 세상이 우리의 적이 된다고 해도
- gwachaeso
- 3월 28일
- 2분 분량
<WT>
타치카와와 이즈미 이야기
「혹여나 온 세상이 우리의 적이 된다면 말이야.」
다른 날이었으면 어디서 또 뭘 주워듣고 온 것이냐고 태클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나온 다른 날을 기억하기엔 너무도 멀리 떨어진 날에 떨어진 우리는 정말로 온 세상이 우리의 적이 된 것만 같은 세상에 서 있는 탓에 남아있는 여유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당신의 것이었고 말이다. 당신만이 이 땅, 이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아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래도 당신 몫의 여유를 나눠 받은 덕에 우리도 우리의 주머니를 조금이나마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당신 덕분에. 아니었으면 지금쯤 분위기는 말도 아니었겠지. 당신이 여유를 잃은 순간 모두가 절망했겠지.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보답하고자 ‘이미 온 세상이 우리의 적인 것 같은데요.’하고 당신이 바라는 반응을 들려주었다. 사실 당신은 어떤 반응이든 상관없어했을 테지만 말이다. 당신이 바라는 건 우리의 반응 자체였으므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말에 반응하길 원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를 덮친 이 모든 일, 모든 것, 세상에 지쳐 의욕을 잃고 널브러진 대원을 일으키는 건 대장의 역할이고, 당신은 이 땅에서 가장 강한 부대의 대장이었다. 우리의 대장. 그리고 그러한 당신은 ‘아무튼.’하고 말을 잇는다. 그럴 걸 예상한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입을 다문다. 이대로 물러설 당신이 아닌 걸 알기에. 내 예상은 틀리지 않을 것이기에. 온 세상이 우리 적이 된다고 해도 그럴 것이기에.
「세상의 책임이라고 생각해.」
“당당하시네요.”
「아니. 아닐 리가 없잖아? 아니야?」
“아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혹여 온 세상이 우리 적이 될지라도 그 세상에서도 우리는 ‘우리’일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온 세상이 우리 적이 된다고 해도 말이죠.”
말을 잇는 중이었다. 머리 위로 조금의 간격을 두고 검격이 날아든 순간은.
정확히 15m 위 상공에서 휘둘러진 검격은 등 뒤에서 나를 향해 휘두르던 트리온 병사의 팔을 잘라 떨어뜨린다. 이에 새삼 놀라거나 감격하지 않는다. 날 끝이 가장 날카로울 거리를 재어 검을 휘두르는 건 당신에게 몹시 당연한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겐 익숙한 합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은 나의 차례다. 하나하나가 하나의 입방체로 잘게 나뉜 입방체의 집합체가 나의 양손에서 떠오르고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겹쳐 오는 조각 하나하나가 어긋나는 일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순간 뻗어나가는 빛줄기는 그 끝에 당신을 두고 절묘하게 휘어지는 궤도를 그린다. 그래스호퍼의 단점은 도약한 이후론 경로를 수정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겁도 없이 옥상에서 도약하여 하강하는, 당신의 뒤로 엄습하는 트리온 병사를 저지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나는.”
씩 웃으며, 검은 연기를 뚫고 나와 착지하는 당신을 맞이한다. 이제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당신은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된다. 나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