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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판단 착오

  • gwachaeso
  • 4월 7일
  • 3분 분량

<HQ!!>

아츠카게

헤어진 구 애인에게 구질대지 않는 법 구합니다



차도를 달리는 차들의 전조등 불빛이 번쩍거렸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빈손을 괜히 옴씰거리다 주머니에 넣었을 때 휴대전화를 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도 없었다. 그렇다면 문도 잠그지 않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열쇠를 흘린 것인지.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못 들어갈 걱정은 들지 않았다. 예비용 열쇠는 현관 앞 화분 받침대 아래에 숨겨져 있었으니, 높이가 손 한 뼘하고도 반 뼘이 되는 화분은 깊었지만 뿌리는 그만큼 제 몸을 내리기도 전에 마르고 바스러져 죽은 지 오래였다. 잊을 만할 때마다 한 번씩 주기만 하면 된다고, 초보자라도 가꾸기 어렵지 않을 거란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데. 누구에게서 들었지? 이제는 마른 흙만 가득 담긴 화분 아래에 누가 처음 열쇠를 숨기자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신호등에서도 눈을 뗐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휴대전화가 손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하루였다.


미야 아츠무가 소식을 다시 한번 들은 건 시끌벅적한 주점에서였다. 천장에 매달린 구식 텔레비전에선 날마다 시간 맞춰 방송되는 뉴스의 마지막 코너로 스포츠와 연예계 소식이 방송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올려다보는 사방의 손님들은 같은 뉴스를 보고도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해당 코너의 진행을 맡은 목소리는 발랄했고, 화면 아래 작은 띠 안에는 그가 소개하는 기사의 내용이 문장으로 요약되어 전해졌다. 주점 안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사이 주인장은 묵묵히 주문받은 병을 꺼냈다. ‘언제 그렇게 됐대?’ ‘그러게 말이야.’ 그때 미야는 네모난 테이블 하나를 혼자 차지한 채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과 적당한 거리로 떨어진 자리라 고개를 높이 들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글자를 읽지 않으면 뉴스를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드는 사람들이, 늘 있는 그런 사람들이 고함에 가까운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고, 바로 앞 테이블에 일행끼리 앉은 이들도 서로 고개를 바짝 붙여야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주점 안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 그 가운데 저와 제가 발을 디딘 이곳은 마치 그들과 유리된 것 같은 괴리감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소란스러운데 저 혼자 있는 이곳은 어떠한 분란 없이 괴괴하기만 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며 주문한 술이 쿵, 하고 테이블 위로 내려앉을 때까지도.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과묵한 주인장이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야는 제가 언제부터 고개를 떨어뜨렸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곧 달려온 제 형제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더니 돌아오는 길에 뉴스를 본 형제가 저와 텔레비전 사이를 가로막아 시야는 차단되었다. 그는 괜찮냐고 물었던 것 같다. 대답하지는 못했다. 괜찮지 않아서 대답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미야는 카게야마를 좋아했다. 갑작스럽거나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뛰어난 배구 선수였고, 제법 잘생겼으며, 그리고, 미야를 좋아했다.


미야를 좋아했다.


입술이 맞닿았으나 그뿐이었던 날이 왔다. 눈은 감았으나 그만이었다. 동이 트듯 봄이 피어나고 새벽이 오듯 겨울이 녹은 날은 오래전 지나가 다시는 오지 않을 성싶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사랑이 끝났음을 알았고, 그들은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헤어지자는 말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말을 꺼낸 이도, 말을 받은 이도 모두 예상한 이 결별은 모두가 예정한 결말. 그렇지만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진심으로요. 나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건조한 사이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애써 노력하진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토록 마른 슬픔도 정상은 아니었다. 건조한 눈가는 그가 고갈된 사랑에 느낀 비감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도 알지 못한 것을 그라고 알았을까 하면 대답하기 어렵다. 너는 내가 나조차 모르게 슬퍼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까? 슬퍼했던 너는. 그러지 않을 것처럼 생겨서 너조차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너는. 나는 그런 너를 알아봤으니 너도 그런 나를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친다.


수많은 얼굴과 추억 어린 시간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섞어가는 중에, 미야는 다만 빛나던 자신의 연인이었던 자를 생각했다. 축하를 전하는 뉴스 코너 속 경쾌한 목소리가 미야에게 미친 반향은 작지 않았다. 그는 잔에 따른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제 눈치를 보던 동생은 손에 들었던 잔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오늘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 제가 차리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래서 미야는 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모두 털어낼 수 있었다. 미야에겐 이제 이것이 제외된 선택지가 몇 개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를, 아니면 그 외의 것을 고를 순간이 왔다고 세상이 통보하였기에 그는 그의 동생에게 말했다. 가자. 집에. 그래.


돌아가기로 했다. 빈 잔을 내려놓은 그에게 동생은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때쯤 미야는 휴대전화를 전혀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걸려 오는 전화를 대신 받은 건 동생이었다. 어어, 방금 소식 들었다……. 그래…….


“축하한다고 전해줘라. 그래.”


입술이 맞닿았으나 그뿐이었던 날이었다. 눈은 감았으나 그만이었다. 동이 트듯 봄이 피어나고 새벽이 오듯 겨울이 녹은 날은 오래전 지나가 다시는 오지 않을 성싶었다. 그러나, 보랏빛이 섞인 남색 하늘에 검은색이 덧칠된, 붓질에 따라 지나간 시간의 색이 섞인 밤하늘을 올려다본 어느 날에 깨달은 사실은 헤어지자는 말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어도 슬퍼하는 사람은 전부였다는 사실이다. 말을 꺼낸 이도, 말을 받은 이도 모두 예상한 이 결별은 모두가 예정한 결말이었으나 적어도 그때는 단정되지 않은 끝이었다.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진심으로요.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 건조한 사이였을 리는 없었다. 나오지 않았던 눈물은 어느 날에 사용되기 위해 저수되어 있었다. 자신을 위해. 이제는 자신만을 위해.


그래. 잘됐네. 축하한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진짜로. 그런 말을 해야 했던 하루. 차도에는 불빛이 번쩍거리고 마른 흙만 가득 담긴 화분 아래엔 누가 열쇠를 숨기자고 했는지 생각했던 날은 오늘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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