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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친절한 코헤이 씨

  • gwachaeso
  • 3월 28일
  • 4분 분량

<WT>

이즈쿠니. 팬아트



그해 5월 이즈미 코헤이는 몇 해 전 결혼한 지인의 소식을 들었다. 5월의 신부였던 지인이 어쩌면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이즈미 코헤이와 퍽 가까운 사이의 지인이었고, 결혼 전 성은 ‘쿠니치카’였으며 이즈미 코헤이는 그를 ‘유우 씨’라고 부르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는 여전히 ‘유우 씨’였다. ‘쿠니치카’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우 씨’인 건 변하지 않아서 그가 결혼한 후에도 이즈미 코헤이는 그를 ‘유우 씨’라고 불렀다. 이즈미 코헤이로 말하자면 여전히 이즈미였고, 여전히 코헤이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 달리 ‘더’ 좋아하는 사람을 찾으려 노력한 적도 없다는 것은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이즈미 코헤이 곁에는 그를 위해 입을 다물어 줄 만큼 친절한 지인들이 많았고 그들 따라 이즈미 코헤이 역시 ‘유우 씨’의 친절한 지인이 되고자 했다. ‘유우 씨’ 본인의 생각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해 5월 이즈미 코헤이는 몇 해 전 결혼한 ‘유우 씨’의 소식을 토마 이사미에게서 듣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즈미 코헤이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그 전부터 얼추 알려진, 조곤조곤한 소리로 넓게 퍼진 소문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즈미 코헤이 곁에는 그를 위해 입을 다물 만큼 친절한 지인들이 많았고, 실로 그랬다.


“타치카와 씨도 알고 있었어요?”


실로, 그랬다.


그러나 그해 7월 ‘유우 씨’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타치카와 케이도, 토마 이사미도 아닌 이즈미 코헤이였다. 메시지는 23시 27분에 전송되었고, 이즈미 코헤이가 그것을 확인한 시각은 23시 35분이었다. 몇 달 만에 받은 메시지의 길이는 짧았다. 새삼 자신을 소개할 필요 따위 없기 때문이리다.


「○○역인데, 혹시 나와줄 수 있어?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그는 본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우산이 없으면 편의점에 들러 비닐우산 따위를 구매하면 그만인 것을, 몇 달 동안 대화 나눈 적 없는 지인에게 우산 좀 빌려줄 수 있겠냐고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가 지갑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고 나왔다는 뜻이겠다. 그럼에도 다행스럽게도 인근에 지인이 산다는 사실은 기억했다는 뜻이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막 목욕을 끝마쳤던 이즈미 코헤이는 메시지를 확인한 즉시 신발장에서 우산 두 개를 챙긴 뒤 고무 슬리퍼에 대충 발을 욱여넣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역 1번 출구, 길게 내려온 차양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를 발견하고 빗소리에 묻히지 않을 만큼의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유우 씨!”


고개를 들어 이즈미 코헤이를 올려다본 ‘유우 씨’의 얼굴은 어쩐지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날보다 조금 더 하얘 보였다. 달려오느라 얼굴에 튄 빗방울을 닦아낼 새도 없이 우산을 접고 그에게 다가간 이즈미 코헤이는 치마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 그를 재빠르게 살폈다. 그것을 ‘유우 씨’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다며 웃은 ‘유우 씨’는 안심하라는 듯이 이즈미 코헤이에게 말했다.


“별일 아니야.”


별일이 아니라면, 지금처럼 늦은 밤에 우산도 없이 지하철역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일이 별일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별일이냐고 그는 물어야 했다.


“조금 다투고 뛰쳐나왔는데 우산을 놓고 나와서.”


만약 ‘유우 씨’에게서 조금이라도 타인이 가한 폭력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당장 그 자식의 턱에 주먹을 갈기러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멈추었겠지. 조금 전 이 역에 도착하는 마지막 열차가 떠났으니까.


“실은 보조 배터리도 빌려달라고 하는 건데 깜박했지 뭐야.”


우산을 받아 든 ‘유우 씨’가 액정이 꺼진 핸드폰을 한 손에 쥐고 흔들며 말했다. 곧장 제 핸드폰을 사용하라며 건넸지만 연락처가 모두 핸드폰에 있어 그럴 수 없다는 말에 이즈미 코헤이는 도로 주머니에 제 휴대전화를 넣어야 했다.


“알잖아. 나 머리 나쁜 거.”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조금은 날을 세워 성은 냈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다시 핸드폰을 꺼낸 뒤 자신의 주소록에서 ‘유우 씨’와 자신의 공통 지인을 찾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막차도 끊긴 지금 ‘유우 씨’를 머물게 할 수 있을 만한 근방의 지인을 검색한 그는, 잠시 후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건 뒤 그가 전화를 받자 전화기를 ‘유우 씨’에게로 넘겼다.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나 ‘유우 씨’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그는 곧 자신의 휴대전화와 함께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요약된 통화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유우 씨’는 30분 정도야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즈미 코헤이에게 그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즈미 코헤이의 집은 여기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달린다면 5분쯤. 비까지 내리는 한밤중 거리에 혼자 멀뚱히 서 있도록 둘 수 없는 이즈미 코헤이는 결국 ‘유우 씨’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어디까지나 ‘유우 씨’가 원한다면. 당연히 ‘유우 씨’를 데리러 올 지인에게도 그쪽으로 오면 된다고 전달할 것이다. 만약 ‘유우 씨’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즈미 코헤이 또한 그 곁에서 지인이 그를 데리러 오길 기다릴 것이다. 그래도 그는 정말 상관없었다. 하지만 ‘유우 씨’ 입장에선 저 때문에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고 뛰쳐나온 이즈미 코헤이를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이즈미 코헤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20분은 무언가를 먹든 마시든 제대로 준비해서 차릴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 아니었다. 또한 내내 역 안에 있었던 ‘유우 씨’는 비를 맞지 않았기에 수건이 필요한 건 이즈미 코헤이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이즈미 코헤이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이런 사람이 아니었던―‘유우 씨’의 의식을 그가 가장 잘 아는 방법으로 돌리기로 했다. ‘유우 씨.’ 먼저 이름을 부르고,


“게임 할래요?”


그러면 그 옛날처럼 눈을 반짝 빛내며 저를 올려다보는 ‘유우 씨’였다. 그 옛날 그가 ‘쿠니치카 유우’였던 때처럼, 게임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던 그 시절처럼 반색하며 ‘유우 씨’가 ‘유우 씨’로 돌아온 듯했다. 그 앞의 이즈미 코헤이는 지금도 이즈미 코헤이였지만, 지금도 이즈미 코헤이인데, 과연 그때가 정말 ‘옛날’일까 같은 생각이 들어 내려가는 입꼬리를 몸을 돌리는 것으로 감추어야 했다.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옛날이라기엔 아직 이르기만 한데.


“이즈미 군 같은 남자를 만날 걸 그랬을까나.”


나란히 TV 앞에 앉아 조이스틱을 붙들고 흔들던 중 ‘유우 씨’에게서 툭 떨어져나온 ‘만약’의 이야기에 이즈미 코헤이는 잠시간 말을 잃었다. 말하는 방법도 잊었다가, 간신히 아무렇지 않게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같은 남자요?”

“응.”


이즈미 군 같은 남자.


그예 이즈미 코헤이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꾸며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소리, 표정, 모든 것을. 하지만 ‘쿠니치카 유우’는 본인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바보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니 분명 알고 하는 소리이리다. 이즈미 코헤이가 감추려는 목소리, 표정, 모든 것을 알기에 하는 소리.

‘헤어짐’을 준비하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끊어냄’에 대한 이야기.


이즈미 코헤이가 대답하지 않아도 ‘유우 씨’는 ‘이즈미 군’하고 그를 부르지 않았다. 이즈미 코헤이 또한 ‘유우 씨’라고 부르며 그에게 정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유우 씨’였다. 언제든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쿠니치카’가 아니지만, 소문이 틀리지 않다면 조만간 ‘쿠니치카 유우’가 다시 그의 이름이 될 ‘유우 씨’. 이즈미 코헤이가 여전히 이즈미 코헤이인 것처럼, 쿠니치카 유우도 다시 쿠니치카 유우로 돌아갈 것이다. 마치 떠난 적 없었던 듯이. 그렇게. 돌아가겠지만. 알잖아?


알잖아.


이즈미 코헤이가 여전히 이즈미고 여전히 코헤이인 것이, 쿠니치카 유우가 다시 쿠니치카가 되고 계속해서 유우인 것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실로 그랬다.

실로…….


그래서 이즈미 코헤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밖에 없었다. 그에게 다음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다음에 올 다른 사람에게, 그에게…….


아…….


“좋겠네요.”


그래도 이건 좀 힘들다고 생각한다.


“저 같은 남자는 행복하겠어요.”


오래전 지나간 5월에 나는 이미 당신의 행복을 빌지 않았던가.

같은 마음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미안. 사과하지 마세요. 그런 대화는 어떤 소리로도 오가지 않았다. 시선으로도 오가지 않았다. 그들을 서로를 보지 않았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화하지 않았다.

조용했다.



쿠니치카 유우가 다시 쿠니치카 유우가 되고 얼마 후 이즈미 코헤이는 타치카와 케이가 그 직전에 기어이 누군가를 찾아갔었다는 이야기를 카코 노조미에게서 듣게 되었다. 코뼈를 부러뜨렸는지 어땠는지 하는 것은 알지 못하나 결국 보더가 나서서 사건을 수습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날 만난 쿠니치카 유우는 이즈미 코헤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즈미 코헤이도 묻지 않았다. 물어야 했을까?


이즈미 코헤이 곁에는 그를 위해 입을 다물 만큼 친절한 지인들이 많았다.


실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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