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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착색되지 않은 미래란 이렇게나 선명하다

  • gwachaeso
  • 3월 27일
  • 2분 분량

<WT>

SUNGLASSES



처음 선글라스를 받고 그것을 머리 위에서 아래로, 그러니까 통상의 안경이었으면 앞에서 뒤로 밀어 썼겠지만 통상과는 다른 구조인 탓에 위에서 아래로 그것을 내리썼을 때 진 유이치는 안도했다. 시력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눈 앞을 가리는 유리알엔 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경 위에 안경을 덧썼다가는 서로 부딪치는 유리알 표면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었다. 교정 없이도 제법 괜찮은 값을 유지하는 시력에 감사하라. 이날엔 알지 못하고 후일에야 친구가 되는 ‘안경인’ 유바 타쿠마는 진에게 그리 말할지도 몰랐다. 동기들과 함께 간 라멘집에서 익숙하게 안경을 벗고 젓가락질하는 그를 보기엔 그는 아직 먼 미래에 있었다. 진은 아직 그때에 이르지 못했다. 진의 미래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다른 것을 비추느라 바쁜 미래시는 선글라스 너머의 세상을 진에게 보이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 말간 풍경을. 유리알의 색으로는 덮이지 않는 세상을. 지금이 아닌 후일의 시야를. 착색되지 않은 미래란 이렇게나 선명하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세상 같다, 고 생각하고 만다. 그야 선글라스를 벗으면 보이는 세상도 이런 색깔을 띠고 있으니까. 착색된 세상이야말로 다가오지 않은, 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 세상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아직’이란 건 알고 있지만. 아니, 아니지. 실은 반대이지만. 그렇지만 역시, 착색된 현실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지 않은 미래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눈이 상하는 것도 아니잖아. 보려고 하면 계속 볼 수 있잖아. 그러니까.


한동안 그것을 벗지 않았다. 내내 그것을 쓰고 다니다 결국 큰소리가 나고 말았다. 아니, 아니다. 큰소리를 냈다. 진이 내었다. 그날 이후 벌어진 키도 마사무네와의 첫 언쟁이었다. 키도는 조용히 말했다. 진, 실내에서는 선글라스를 벗어라. 그 말에 불퉁하게 대꾸했다. 싫어요. 괜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 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모가미 씨를 데려갔잖아, 키도 씨가. 결국 내가 다시 데려오게 될걸. 그리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진. 현실을 봐라. 그 말에 다시 삐죽하게 대꾸했다. 충분히 보고 있어요. 제대로 봐. 보고 있다니까요. 똑바로 봐. 진.


아무리 미래를 보아도 모가미가 살아 돌아오는 미래는 볼 수 없어.


알잖아, 라곤 말하지 않았는데. 그 순간 울컥 치솟는 감정을 견딜 수 없어 소리쳤다.


소리치고 후회했다. 키도 씨가 모를 리 없는데.


깊은 골이 파이기 전엔 작은 골이 모여 사이를 파내는 법이란 걸 진은 그때 알았다. 넓게, 그러다 깊게. 그러다 결국 좁게.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아이를 달래주기엔 어른들 모두 지쳐있을 때. 우는 소리를 듣고 온 린도 타쿠미와 키도 사이 언성이 높아지고 시노다 마사후미가 말릴 때. 키자키 레이지와 코나미 키리에, 린도 유리가 다가와 저를 이끌어 자리를 옮기고 달랠 때. 하나둘 작은 골이 모이기 시작했다. 작지만 많은 골이.


한동안은 그것을 쓰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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