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랑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
- gwachaeso
- 3월 18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19일
<Fate Zero>
코토미네 이야기. 약물 주의
미숙한 존재의 눈에 비치지 않는 격의 숭고함이란 얼마나 고고한 것인지. 믿음이란 그가 취하고자 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부한다고 하여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그리 배워왔기에―그는 제 아버지의 신이 아버지에게 하신 것 같이 제게도 인도하심을 베푸시기를 기구하고 기도하며 기망하였다. 아버지의 신이 곧 아들의 신도 되어주시기를 바라며 희망을 품고 그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기도했다. 인도하심에는 숭고한 진리가 있을 것이며 구원하심에는 신성한 복음이 있을지어다. 태초에 빛이 있으란 말씀이 있었던 것과 같이 제 최초에도 신이 있었으리라. 코토미네 키레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사실을 믿었고―동시에 믿지 않았다. 영민한 머리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신의 사랑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 그것은 코토미네 키레이라고 적는다.
코토미네 키레이는 그런 자였다. 그물에서 놓여난 물고기. 땅에 떨어져 아무도 줍지 않은 이삭. 양식糧食이 될 수 없는 존재에게는 양식良識이 깃들 일도 없으니 이 존재는 참으로 불경하고 불민하고 불미하였다. 인격이 결여된 자에겐 신격을 알아볼 눈도 주어지지 않으니 어쩌면 인자人子께서는 일찍이 그 인자因子를 알아보시고 손을 저은 게 아니셨을까.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다.’ 일생 그를 지배한 구절이다. 너는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좋을 뻔했다면 세상을 원망했겠으나, 너는 나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좋을 뻔했다. 너 자신에게. 그러하다면.
분노와 절망이 향할 곳도 자신뿐이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은 적 없는…….
…….
안개 속에서 깎아지른 절벽을 연상한 날이 있다. 그 앞으로는 한 걸음만 내디뎌도 추락할 것을 알기에 물러서라 뒤로 잡아끌던 본능이 있다. 현기증과 비슷한 감각에 키레이는 걷는 속도를 늦추고 벽에 손을 댔다. 사별한 아내에 대해 떠올리려고 하면 이렇다. 그러나 지금이 사별한 아내를 떠올리기 적절한 때인가 하면 그건 아니. 아니기에 그는.
수신의 고행이란 명목을 빌어 반복한 자상 행위 중 하나를 오늘 선택한다. 주사를 집어 든 그는 이를 손가락 끝으로 퉁, 퉁기어 공기 방울을 빼낸다. 얼핏 듣기로는 공기 방울이 혈관으로 함께 주사되어 판막이라도 막았다가는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하고자 이런 절차가 존재한다고 했다. 모른다, 사실인지는. 정말 그러한지는. 또한 그러한 사고를 막기 위해 흉내 내는 자신이 과연 옳게 흉내 냈는지는. 자신이 정말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지는. 이 신체에는 옳게 들어가지 못한 공기 방울, 숨 방울마저 이물질이 되고 독이 되어 신체를 상하게 했다. 그들에겐 그를 해치려는 목적 없이도 손쉽게 그를 해치고, 풀어 헤치고, 아니, 이 경우에는, 틀어막았다. 목을. 숨을. 혈관을. 생을. 이상도 원망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재하기에 너는 존재하지 않아 마땅하다, 하듯이. 이상도 원망도 존재하지 않는 너는 무엇이냐, 하듯이.
그런 생각을 하다 바늘로 쿡 살갗을 찌른다. 아, 소리 낼 만큼 미숙하지는 않다. 주입되는 용액은 유리관을 타고 흘러내려 혈관으로 주입된다. 타오르는 느낌이 아래팔과 위팔을 잇는 오금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혈관을 타고. 오늘의 메뉴는 무엇인가. 환상과 환후, 다소의 환청과 약간의 쾌감이 블렌딩 된 액체 5ml가 피부 아래 흐르는 피를 축복하고 잠시 후 그 핏속의 혈구가 산소를 가득 실은 채로 도달할 코토미네 키레이의 뇌를 축원한다. 성수를 뿌려 정화해도 모자랄 판에 정화조에 처박힌 것과 다름없는 뇌는―다시 말해 그리 다르지 않을 뇌는 이제 그가 바라고 또 바라지 않은 영상들을, 예상하되 예상하지 않은 연상들을 눈 위로, 다시 말해 눈꺼풀 아래로 송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속삭인다―다시 말해 환청이다. 눈을 감지 마. 눈을 떠요. 봐라. 즐겁니?
그래서 이것이 바라던 유열인가 하면 아직은 이르지 못한 듯하다.
어디에 이르느냐고는 물을 필요도 없다. 알지 않은가.
신체적 반응은 있었다. 반사적으로 흘러나왔던 눈물과 침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익숙하게 뒤처리를 한다. 팔뚝 위를 묶었던 고무줄도, 주사도, 바늘도 모두 소각하여 처리한 후 의복 역시 앞서 이미 세탁해 둔 새 의복으로 단정하게 갈아입으면 모든 것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감추고 지우고 숨기고 묻을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 스스로 이 행위가 성직자로서, 성직자가 아닌 인간으로서도 부끄럽고 금지된 행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만, 가끔은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다. 그러면 높은 확률로 이를 목격한 사람은 아버지가 될 터인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자식의 배덕에 분노할까. 일갈할까. 어느 쪽이든 이전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변화가 부자 사이를 관통할 텐데, 자신은 그것을 바라는지. 이 지경까지 와서도 여전히 바라는 게 ‘없는지’. 있긴 한 건지, 그에게. 이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이 미숙한 존재는 숭고하기를 바라는 대신 탕자와 같이 취하기를 택한다. 그는 제 아버지의 신이 아버지에게 하신 것 같이 제게도 인도하심을 베푸시기를 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신酒神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며 아들, 그리고 조카를 때려죽이고 그 목을 사자의 머리인 양 들고 행진하던 여신도들을 생각하길 그치지 않는다(<바쿠스의 여신도들>). 숭고한 진리가 있을 인도와 신성한 복음이 있을 구원은 그에게 너무나 멀고 멀기 그지없을 만큼 멀기만 하다. 그는 태초에 빛이 있으란 말씀이 있었던 것과 같이 제 최초에도 신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지만, 영민한 머리는 이미 깨달은 지 오래다.
안개 속에서 깎아지른 절벽을 연상한 날이 있다. 하나 그날은 과거에 있을 따름이라.
신의 사랑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
그것을 그는 코토미네 키레이라고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