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비자림

벽 속의 고양이

  • gwachaeso
  • 3월 28일
  • 10분 분량

<WT>

고양이의 날 기념 연성



고양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귀엽다?


오는 길에 고양이라도 보았던 걸까? 아이들이란 도통 예상할 수 없는 질문을 예상할 수 없는 때에 던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런 아이에게 성의 있게 대답해주려고 해도 아즈마 하루아키의 머릿속에 고양이란 생물은 딱 그정도의 인상만 가지고 있었다. 귀가 뾰족하고, 털이 부드럽고, 만지면 의외로 근육이 탄탄하고, 액체처럼 요리조리 흘러다니는, 상자를 좋아하는 포유류의 한 종. 게다가 귀엽지. 응, 제법 귀엽지만 그래서 개 파냐 고양이 파냐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개에 관해서도 비슷한 인상을 늘어놓으리다. 귀가 뾰족하거나 둥글고, 털이 부드럽고, 만지면 의외로 물렁하고, 그래도 액체처럼 흐르지는 않는 포유류의 한 종. 상자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고양이처럼 인상도 퍽 귀엽다. 개도 고양이도 기르지 않는 이유는 그가 머무는 멘션의 규칙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 외에 다른 생명을 돌볼 여유가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는 물론이고 고양이도 집에 혼자 방치하면 외로워한다질 않나. 개체에 따라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는 녀석도 있겠지만 그런 건 함께하기 전엔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고, 그렇다고 데려왔다가 저와 맞지 않다고 돌려보내는 건 안 될 일이고, 이러한 고민을 하는 이유는 아즈마 본인이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집, 학교, 보더. 그중 집에 머무는 시간은 아침 또는 밤뿐이니 낮의 대부분 시간 동안 그들은 집에 방치되어야 한다. 설령 제가 데려온 개 또는 고양이가 외로움을 타지 않는 개체라고 해도 아즈마 본인의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여러 마리를 함께 들이는 건 감당할 깜냥이 되지 않는 것이 물론. 결국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리라. 사실 그렇게까지 개와 고양이를 좋아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데 함께 사는 것은 서로가 불편할 일이지. 아이에게 질문을 받아, 아이에게 대답하고, 제 대답에 따른 아이의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아즈마의 머릿속에 부풀었다 바람 소리를 내며 빠진 생각들을 위와 같다. 그렇다고 아이가 아즈마의 대답에 오랫동안 응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아즈마의 생각이 조금 빠른 것뿐이었다. 늘 그렇듯이, 또래보다 조금 일렀던 성장과 같이.


저는 조금 무서워요.

그래?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할 뿐 이유를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런 그를 눈치챈 건지 아니면 그저 말하고 싶었는지 아이는 곧이어 이유를 말했다. 책을 읽었는데요, 그림이 너무 무서웠어요. 아, 아하. 어느 책인지 제목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였니?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는 아이였다. 그새 다시 연상한 삽화에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떠는 듯한 아이는 제 생각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고양이에게 잘못은 없지만요,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매번, 매번.

글쎄, 그런 말이 있긴 하더라.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

그럼 그 고양이는…….


아이는 양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였다. 몇 번이나 죽었는지. 그래서 몇 번이나 더 살아 돌아올 수 있는지. 근데 그 고양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던가? 목이 졸려서 죽은 게 한 번, 그래서 목에 밧줄 모양으로 점점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 그 고양이의 두 번째 생. 그 고양이도 죽었던가? 그래도 많아 봤자 두 번이지 다섯 번씩이나 죽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나 아이의 한 손은 이미 모든 손가락을 구부려 그 속으로 엄지를 숨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제가 기억하는 책의 내용에 그렇게까지 오류가 많았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직접 원문을 확인하여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아이가 읽은 판본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에게 처음으로 질문하려던 때였다. 아이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깨달은 때였다. 그제야 아즈마는 자신이 제 눈앞의 아이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름을 모르는 게 아니다. 자신은 이전에 이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아마 제 눈빛이 변하는 것을 아이도 보았을 것이다. 아이는 아직 주먹을 쥐지 않고 펼쳐져 있는 손을 아즈마가 볼 수 있게 흔들어보였다. 인사하는 것처럼, 동시에 보여주는 것처럼.


다섯 개 남았어요.


아니, 네 개. 수정되는 말과 함꼐 엄지가 접히는 것과 동시에 아즈마는 눈을 떴다.


아.


시각보다 앞선 통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제 곁에 모인 아이들이 울면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 축축한 것일까? 아니, 얼굴을 적신 액체의 정체는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였다. 하지만 머리카락까지 적실 정도는 아니지. 뒷머리를 젖게 한 액체는 깨질 듯 아파오는 뒤통수에서부터 흐르는 피가 되리다. 거기까지 추론한 뒤 알게 된 것은, 아니, 기억해 내는 것은 오로지 제 기억으로부터 헤아린 시간 감각으로 조금 전에 제가 옥상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트리온 전투체가 아닌 본체로. 그런데도 운 좋게 죽지 않았다? 사람은 2, 3 미터에서도 떨어지면 추락사로 사망할 수 있는데, 운이 터무니없이 좋아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들려줄 순 없었다. 아즈마 씨, 곧 구급차가 와요. 조금만 버텨요. 곧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제가 안심시켜야 할 아이들이 갖은 애를 쓰며 필사적으로 저를 안심시키려 든다. 그에 그렇구나, 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은 어른으로서 조금 엉망이겠다. 하지만 아즈마는 지금 그들이 가장 원하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줄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면, 알지 않은가. 팔다리에서 몰려오는 끔찍한 격통도 멀어지는 의식에 마취된다.


아즈마 하루아키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 네 개의 목숨이 남아 있으므로.



유다르게 운이 좋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됐다. 어릴 때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적 있다는 부모의 말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며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분의 말로는 두 살쯤 되었을 때 마루에서 떨어진 적이 있단다. 어머니의 비명을 듣고 방에서 뛰쳐나온 아버지는 당장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고, 다행히도 그날 죽지 않은 아기는 무사히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다시 입학하고 졸업하기를 반복해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어. 어머니께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반복하셨고, 덕분에 자식은 토씨 한 톨 안 틀리고 외워 똑같이 읊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일까? 이제는 떨어져도 혹 하나 나긴 할까 싶은 본가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바라보며 아즈마는 그날 아기의 숨을 붙여둔 하늘에 관해 생각하다 뒤로 누웠다. 눈도 감았다. 하루아키. 머리 안 자를 거면 묶고 다녀라. 마루를 지나 부엌으로 건너가던 어머니가 하시는 말에 눈조차 뜨지 않고 네에. 대답하며 머리끈을 제가 방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하던 오월의 날. 하루 중 한낮. 돌연 지축이 흔들리고 굉음 뒤로 비명이 들리던.


개벽의 때.


아즈마는 몸을 벌떡 일으켜 일어나 마당을 거쳐 닫혀 있던 대문을 열었다. 하루아키! 무슨 일인지 보고 올게요. 집에 계세요, 어머니. 후일에 생각하기로 아즈마는 자신의 선택이 지극히 현명했음을 알았다. 트리온 병사는 트리온이 높은 자들을 감지, 추적하여 생포하고 그 일대에 기준에 못 미치는 인간을 발견할 시 트리온 기관을 적출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어떠한 훈련도 하지 않았음에도 제법 높은 트리온 수치를 가진 아즈마가 그날 본가에 있었다면 그것들을 제 가족 곁으로 유인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들 곁을 떠난 것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그것을 입 밖으로 낸 적도 없었다. 후일에 만나는 어떤 소년에게는 참으로 잔인한 추측이기 떄문이다. 네가 네 가족을 죽음에게로 인도하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확실하지도 않고, 확실하다 한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머리 위로 쓰러지는 전봇대를 피해 몸을 굴렸다. 본디 발 밑에 있어야 할 아스팔트에서 부서져 떨어져나온 돌조각들이 바닥을 디딘 손바닥에 가득 박혀들었다. 온통 얼얼하기 그지없었지만 우는 소리 할 시간은 없었다. 있을 리 있나. 그럴 시간에 저, 멀리 저를 하나뿐인 거대한 눈으로 응시하는 하얀 괴생명체에서 도망칠 방도를 궁리해야지. 그러나 그들은 거대했고, 거대하면서 민첩했고, 거침없었다. 달리다 누군가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산 자의 발을 잡는 죽은 자라니.


죽는 걸까?

아니.


떨어지는 순간 떠오른 것은 어릴 적, 자신이 그것을 이토록 오래도록 기억할 줄은 몰랐던 시절 정글짐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어쩌면 그게 두 번째던가.


세 번째는 지금이고.


넘어지는 순간 머리를 콱 찍어 버린, 돌보단 바위에 가까울 돌, 아니. 무슨 소리야. 콘크리트 조각? 그럼 돌인가? 아무튼 알 수 없는 것을, 헤아려지지 않는 것을, 손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누군가 제 앞에 서 있었다. 반으로 갈라진 괴물과 함께 있던 그는 저를 보자 놀란 얼굴로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저 앞에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나고 그것을 달려나가느라 대답은 듣지 못했다. 곧장 대답하지 못한 탓을 아즈마에게 묻기는 어려우리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머리를 잘못 부딪친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쉬고 있자니 제 발로 응급실까지 걸어갈 힘은 나서, 응급실에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그래도 두 분은 안 다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너부터 살펴라. 네 꼴을 봐. 하하.


과연 그 말대로 그는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에 관해 무언가 알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느낀 것은 그날부터 시작인 듯하였다. 그렇다고 직접 실험해서 알아볼 생각 따위 하지 않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검증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지 않나. 생사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에 운이 좋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운이어야 자신하지 않는다. 자신하지 않아야 자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번엔 운 좋게 살았지. 다음은?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래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은, 운이 좋았네.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 봐. 내가 이런 운은 좀 있나 봐. 어릴 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니노미야.


야간 방위를 마치고 돌아갈 땐 항상 집까지 차로 바래다줬는데. 하필 차 키를 놓고 온 자신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어느 정도는 저에게도 책임이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럴 리가 있겠나. 이 상황에 관해 그렇게까지, 자신에게까지 책임을 분배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기에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을 말이지. 그러나 평소라면 절대 떠올리지 않았을 생각 하며 아무 말이나 뇌까리려다 간신히 멈추는 입을 보니, 확실히 상태가 나쁘긴 한 것 같았다. 괜찮아. 그래도 그렇게는 말할 수 있는 어른이었고, 저는. 사실은 몰랐다. 다만 거짓말할 힘이 있었을 따름이고.


새파랗게 질린 건지 새하얗게 질린 건지. 어둠 속에서는 색이 잘 분간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도망가는 취객을 저 떄문에 쫓지 못한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에겐 해가 없어 다행이었다. 이 자식,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방해야!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편의점에서 나오는 아이에게 시비를 걸던 취객의 손을 붙잡아 꺾은 건 과한 처사였을까? 제가 굳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제 한 몸 스스로 방어할 수 있을 만큼 건장한 아이이긴 해도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어른이 그 상황을 목격했는데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주체가 다른 이야기다. 좋은 말 할 때 돌아가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경찰에 바로 신고하자 취객은 욕설과 침을 함께 내뱉고 돌아섰다. 그런 줄만 알았다. 어휴, 오랜만에 걸어서 돌아가려니 사건사고가 많네. 분위기를 풀 겸 가볍게 말하자 네, 하고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그였다. 이 상황에 책임이 없는 그는 아즈마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미와, 츠키미, 카코를 먼저 데려다주고 마지막으로 남은 니노미야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르자고 한 아즈마 또한 사과하지 않았듯이. 아, 집에 물 다 떨어졌는데 잊고 있었다. 잠깐 생수 좀 사고 나와도 될까? 또 잊어버리기 전에. 그러세요. 그 말에 그를 두고 들어갔다 온 사이에 벌어진 사건.


대침공 이후 입대한 보더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나마 연장자에 속했기 때문인지 아즈마는 상부의 뜻에 따라 자신의 부대에 배정된 아이들을 맡게 되었고, 가장 나이 많은 아이들, 니노미야와 카코도 저보다 다섯 살은 어리니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짊어진 책임감에 걸맞게 행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부끄럽지 않게 행동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대로 내쫓겨 돌아간 줄 알았으나 반격을 꾀한 자가 그 자리를 떠난 저희를 쫓아와 망치를 휘두를 줄은 알지 못했다. 니노미야에게는 몸을 피하라고 소리쳤지만 하필 아이는 또 말을 듣지 않았다. 하필, 또 하필 트리거는 조정이 조금 필요한 관계로 보더에 두고 온 날이라 손은 비어있는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아. 아마 같은 생각을 했기에 도망가지 않은 것이겠지. 그러나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바로 몸을 빼는 게 맞는 거잖아. 그래서 그 뒤의 일이 벌어진 건 아니지만. 따라서 그는 여전히 아즈마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고 아즈마 또한 그렇다. 퍽 소리와 함께 사람 머리를 깨뜨린 자는 그 주제에 실 끊긴 목각 인형처럼 쓰러지는 그를 보니 술이라도 깼는지 그제야 겁을 지레 먹고 주춤거렸다. 니노미야가 험악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볼 뿐 섣불리 쫓지 못한다는 걸 알자 망치를 버리고 내빼버렸다. 그래도 그래서 다행이었다. 뒤쫓았다가 자신에게 뒤가 없다는 걸 깨달은 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까 괜찮다. 비록 자신은 저 아래로,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떠오른 것은 마루에서 듣던 이야기였을까? 이름을―잘 지은 건지도 모르겠어. 여기서 멈추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거든. 거기서부터는 듣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내용.


신이시여, 이 아이의 이름을 살펴주세요. 아직 제게서 이 아이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이 아이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지금은 너무 짧아요. 조금만 더 보태주세요. 이 아이의 이름을 알아주세요. 고작 두 번의 봄과 가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아시잖아요.


어머니는 그에게 그날 자신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거기서부턴 오롯이 그의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자신의 상상이 현실과 꽤 근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고, 다시 건져지지 못한 채로 젊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연상한다. 떠오르는 순간 떨어지는 것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줄 안 기억 속의 어린 몸뚱어리다. 넘어지는 순간 무너지는 것은 지나간 세 번째 추락의 기억.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그날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그날처럼. 하지만 괜찮아. 자신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제법 운이 좋거든. 이런 데서는.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지 않을까? 어릴 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결국 괜찮아졌어. 그러니 괜찮을 거야. 나는…….


목숨이 한 아홉 개쯤 되는 것 같거든.

이미 몇 개는 써버렸지만…….


웃으라고 한 농담에 아이는 웃지 않았다. 이거야 원, 너희를 돌보는 건 언제나 쉽지 않구나. 그래도 곧 구급차가 오고 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그들에게로 달려온 덕에 실없는 농담은 이제 그만할 수 있었다. 부축을 받아 구급차로 오르며 그는 생각한다. 이번이 네 개째가 되려나? 아닌 척해도 어느 정도는 자만했던 게 분명한 자신이다. 이 자리에서 죽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으니,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어떠한 예감도 함께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다섯 번은 더 이런 일이 있으리란 생각. 자신은 남은 다섯 개도 온전히 부지하지 못하리란 예상. 그 전에, 제가 한 농담을 저는 꽤 재미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람 목숨이 어떻게 다섯 개나 된단 말이냐. 하나뿐이지. 하나뿐인 것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생각 끝에서 감았던 눈을 떴다. 입원실이었다. 역시나.


처음에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가 편의점 앞 골목인 줄 알았다. 그날과 같이 저를 노려보고 있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즈마에게서 웃기지도 않은,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들었던 그날처럼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에 겁먹을 리 없는 아즈마는 그저 웃었다. 병문안 왔니? 예. 화를 내는 건 내는 거고 대답은 또 착실하게 한다. 어둑한 입원실을 보니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한참 전에 왔다가 잠든 그만 지켜보고 돌아갔겠다. 애들이 많이 걱정했겠다. 예. 너도 그렇고. 예. 단답으로 잘라 말하는 것은 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맹이 없이 늘어놓는 미사여구를 싫어하는 본래 성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에는 사실 의미가 없었다. 둘 다일 테니. 그 정도도 모를 사람도 아니었다. 비록 아즈마가 그들을 자신의 부대원으로 데리고 다닌 지는 오래되었을지라도.


깨어난 거 봤으니까 이제 됐겠다. 시간이 늦었는데 너도 돌아가렴. 아즈마 씨는. 나?

이제.

이제?

몇 개나 남았습니까? 아니.

몇 개나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슬슬 꾸지람 들을 때도 됐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맹세코 지금껏 제가 제 목숨을 가벼이 여기거나 ‘운’을 믿고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계속해서 그 운을 시험당할 뿐이지. 이번엔 어떨까? 이번에도 살아날까? 하는 식으로. 어쩌면 그냥 태생이 명줄이 짧은 사람인 건지도 모르겠다. 짧은 명줄을 주변 사람 덕에 이어 붙이고, 하나 그 끝에 이어 붙일 수 있는 명줄도 짧기 그지없어서 금세 또 명줄을 다하게 되고. 목숨이 아홉 개가 아니라 아홉 등분 난 인생인 게지. 그중 다섯 조각은 이미 떨어져나갔으니 남은 건 네 조각뿐이겠다. 아, 소설 속 검은 고양이도 그랬을까? 소설 속 주인공은 악한이라 그의 고양이가 제 수명대로 살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도 다섯 번이나 죽진 않았던 것 같은데, 또 모르지. 벽 속에서 고양이는 몇 번을 죽었을까? 간신히 아홉 번째 목숨이 다하기 전에 벽이 무너지고, 빛이 새들어오고, 그 뒤는 어떻게 되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다시 한번 책을 읽어봐야겠어. 원문을 확인한다면 그게 가장 정확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할 말은 다 했고 일어난 모습도 보았으니 저는 돌아가겠다고 하는 그를 배웅한다. 수년 전 일까지 끄집어내며 조심히 행동하지 않은 그를 꾸짖는 것을 보면 많이 걱정했구나 싶고, 많이 놀랐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 저는 그냥 운이 좋지 못했을 뿐이니까. 사실은 그랬다. 정말 그랬다. 운이 정말 좋았다면 죽을 위기 같은 것은 애초부터 겪지 않았겠지. 그의 인생은 그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꾸만 사선 가까이로 다가붙어 흐르려는 성질을 가지니, 그걸 알면 그래도 의식하여 조심할 수야 있겠다. 조심히 돌아가렴. 나도 이제 진짜 조심할게.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또 어쩔 수 없겠지. 그도 그 사실을 아는지 부러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대답하진 않았다. 당신이라면 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씀하시겠죠. 그렇게 말하면 그는 무어라 대답해야 옳겠는가? 웃을 순 있겠다.


하하.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는.

오월의 날. 하루 중 한낮. 돌연 지축이 흔들리고 굉음 뒤로 비명이 들리는 개벽의 때.

아즈마 하루아키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떠올린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니노미야 마사타카를 업은 채로.


검은 고양이는 아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니까 결말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기로, 그 책은 악한인 주인공의, 감옥에서의 회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사형을 앞뒀을 것이다. 아내를 살해한 혐의였지. 아내를 살해한 그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숨기기 위해 벽돌을 쌓고 벽을 발랐다. 문제는 그 안에 검은 고양이도 함께 넣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살아남은 검은 고양이는 벽 속에서 계속 울었다. 경찰이 그 벽을 허무는 순간까지 시체의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에 발톱을 움키어 선 뒤 주인공을 노려보며 울길 그치지 않았고, 주인공은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살인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니 최후에 죽은 것은 아마 주인공. 그 전에 죽은 것은 그의 아내. 고양이는 결국 마지막까지 죽지 않았다. 죽어도 계속 살아돌아왔으니 그건 죽었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아홉 개의 목숨을 다 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고양이는 그만큼이나 살해당하지 않았다. 악한의 손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고양이 곁에선 다른 사람이 죽어나갔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죽어나갔다. 지금처럼. 지금 제 주변처럼.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지금처럼. 코아라이. 오쿠데라. 히토미. 거기 있니. 니노미야 부대. 거기 있나? 없어?


아무도?


벽 속에는 고양이만 혼자 살아있었다. 몇 번을 죽었든 살았든 마지막까지 그는 살아 있었다. 아, 그는 운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가 곧 운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곧 불운이었기 때문에 떨어지는 순간, 혼자였던 어린 시절이 차라리 좋았다. 넘어지는 순간, 혼자 몸을 일으킬 수 있던 그때가 차라리 좋았지. 고양이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역시 좋았고, 목숨이 아홉 개나 된다니 따위의 소리를 할 때가 정말 좋았고, 자만할 때가 역시 좋았지? 하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는 있다. 이야기의 교훈. 그보단 당연한 상식.


고양이에겐 잘못이 없다.

근데 그는 고양이가 아니지.

어떻게 사람이 고양이일 수 있겠어?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