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덴의 신
- gwachaeso
- 3월 27일
- 5분 분량
<WT>
키도파 득세 이전, 이후의 미래
1. 이전
미덴에는 신이 없다면서요.
부럽네요. 우리는 신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그러며 툴툴거리는 후배에게, 그러는 너는 툴툴거리는 것 말고 한 게 무엇이냐고 면박을 주려다 생각을 고쳐먹고 그만두었다. 자신은 지금 괜한 데 성질을 부리며 화를, 정확히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고 있고, 후배 놈 또한 가벼운 입과는 다르게 손은 착실히 움직이는 편이기도 했다. 몇백 년마다 한 번씩 신을 찾아야만 하는 불안정한 대지에 발을 딛고 사는 와중에, 하필 새로운 신을 옹립해야 하는 시대에 태어나고 말았으니 불안에 불만투성이가 되어도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이 사라지길 바라는 건 신을 위한 바람이기도 하니 신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땅을 부러워하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신이 없는 땅. 신이 죽어도 괜찮은 땅. 신이 죽어도 인간이 죽지 않는 땅. 아, 마지막 말은 조금 잘못되었다. 인간은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신이 있든 말든 죽어 나갔으므로.
이 땅을 보아도 그렇다. 신도 없고 인간도 없는. 정확히는 신도 없고 인간도 죽는 땅.
미덴.
그리고 그들 눈앞엔 50m 정도 떨어진 전방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미덴의 병사가 있다. 무릎을 꿇고, 그 무릎 위에 죽은 다른 병사의 머리를 누인 병사.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지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죽일까요? 저자도 그러길 바랄 텐데. 가벼운 입에 걸맞은 가벼운 생각, 정신머리지만 지금만큼은 후배 놈 역시 가벼이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미덴의 병사의 눈은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다. 비유가 아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는 이미 눈앞에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다.
제 무릎에 누인 동료가 이미 명을 달리 했음을 그는 아는가?
알 것이다. 죽음을 감각할 수 있는 건 시각뿐만이 아니므로.
됐어. 내버려둬. 꿈자리 사나워지는 짓거리는 오늘 충분히 했으니까.
내버려두면 죽을 거야.
부상에 의해서든, 다른 무엇에 의해서든. 그 말에 후배 놈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죠. 뭐.
체내에 많은 트리온을 가진 이계 또는 이국의 인간은 납치 후 전투원으로 쓰이곤 하지만, 훈련받은 병사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복수할 기회를 손에 쥐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뇌한다고 해도 100% 안심할 수는 없기에 껄끄럽다. 충성심이 남다르기에 군인까지 된 게 아닌가. 그래서 전장에서는 트리거 사용자와 맞닥뜨리게 되면 그들의 명령 체계까지 손에 넣어 완벽히 굴복시키는 게 아닌 이상 그들을 완전한 전투 불능으로 만들도록 되어 있었다. 트리거를 갈취하거나 더는 트리온체로 변신할 수 없도록 하는 행위가 이에 포함되었다. 목숨을 잃게 하는 행위는 후자에 포함되었다.
지금껏 미덴은 그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 베일 아웃을 통해 그들 전투원의 인명을 보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파훼하는 것은 미덴을 침공하기 전 선행되어 개발되어야 할 기술 중 하나였다. 지금처럼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키기로 마음먹는다면.
미덴에는 신이 없으니까…….
아직도 그 소리냐.
기도할 대상도 없겠네요. 불쌍해라.
그 말에 너는 우리의 신에게 기도하는 인간이었냐고 하려다 의외로 그렇다고 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은 마더 트리거에 바쳐져 평생을 마더 트리거와 별을 돌보는 데 바치는 산 제물에 붙는 이름이었지만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숭배하는 종교는 그의 행성에도 있었다. 제 후배 놈이 의외로 종교인일 수 있으니 말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싹퉁바가지 없는 놈이기는 해도. 대신 이렇게 말할 수는 있었다. 눈앞의 눈먼 병사를 바라보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꼭 신에게 기도해야 하나?
그럼 누구에게 기도해요?
기도야 누구에게든 할 수 있지. 저 병사처럼.
아까부터 입을 멈추지 않고 있는 저 병사처럼, 중얼중얼, 시체에 제 바람을 불어넣는 저이처럼, 그럴 수 있지. ―― 씨, 일어나 봐요. 제 말 듣고 있어요? ―― 씨. ―― 씨…….
그럴 수 있지…….
가자.
예.
내버려두면 죽을 것이다. 어떤 것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리 말하며 발을 옮긴 것을 그는 기억한다. 몸을 돌린 것을. 고개를 돌린 것을. 눈을 돌린 것을.
그러니 이제는 마주할 때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폐를 찔린 것일까. 입 밖으론 피가 주룩 흘러나왔다.
그때는 검 대신 트리온 탄환을 쏘아댔던 자로 기억하는데, 제 가슴에서 검을 비틀어 빼내는 자의 눈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죽은 눈이다.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죽은 눈. 쿨럭이다 간신히 입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널 기억한다. 너도 날 기억하나?
그에 그자가 대답한다. 기억해.
하지만 이제 잊을 거야. 왜냐하면 이젠 기억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참으로 현명한 판단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끄덕이고 싶었지만 다시 들지는 못했다.
포로는 없었다.
2. 이후
그는 오래전 ――에서 미덴 병사와 혼자 맞닥뜨린 적이 있다고 말한다.
맞닥뜨린 순간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트리거를 손에 쥔 그였지만, 그가 그러든 말든 편법으로 만든 티가 난 낚싯대와 낚시찌에나 관심을 쏟던 미덴의 병사는 이틀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그에게 그가 가진 식량―방금 잡은 물고기를 선뜻 나눠줄 만큼 선량했다고 한다. 해가 저물었을 땐 함께 야영을 하고, 날이 밝았을 땐 함께 사냥을 할 정도로도. 낯선 땅에서 동료들과 손쓸 틈 없이 헤어져 고립된 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고, 서로를 향해 날을 바짝 세워 겨누기엔 두 사람 다 지쳐 있었다. 트리온도 바닥. 군사 작전을 수행 중인 병사로서 적절치 못한 행태임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처벌도 없지 않은가. 싸움은 높으신 분들이 결정한 것이고 그들끼리는 새삼 나눌 원한이 없었다. 동료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고 갈 길을 달리해 갈라져 헤어질 때까지, 그는 자신이 미덴의 병사와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했다. 조심하고, 들키지 마. 고마워. 이런 식으로는 또 보지 말자, 우리. 그 말에 웃었던 기억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자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고. 미덴 병사에게 말하면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던 자가 말한다. 그래요. 그래. 이름은 알아요? 그 사람. 기억에서 건져 올린 이름을 말하자 이젠 픽 웃기까지 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그럴 리 없냐면, 원한이 없을 리가 없는데. 그 애가. 명백한 비웃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선 저를 향한 적의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나면 알 거라고, 그를 만나게 해줄 순 없겠냐고 손을 뻗는데 그거 조금 가까워졌다고 신경질적으로 탁 내치는 손이다. 헛소리 좀 작작 하세요, 좀. 헛소리라니. 그럼 헛소리가 아니고 뭐겠어요?
그 애가 죽은 지가 언젠데.
뭐? 당신들이 죽여 놓고 뻔뻔하게 뭐라는 거야. 아, 더는 듣기 싫어. 우리 조용히 갑시다. 죽으러 가는 길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우리가 서로 친해질 이유가 있어요? 난 지금 댁들과 화해한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그에게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소로를 따라 조용히 걸었고, 마침내 이곳까지 마중 온 그의 나라 병사들에게 그를 인계했다. 다친 데 없냐고, 어디 험한 꼴 당하지는 않았냐고 묻기엔 아직 그들의 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머릿속에서는 제가 만난 이가 혹 죽은 미덴 병사의 귀신 같은 게 아니었을까 같은 생각으로 번잡하기 이를 데 없고, 그렇게 치면 미덴 병사는 왜 그를 죽인 나라의 병사인 저에게 친절하였나 같은 생각으로 이어져 혼란스럽고 일면 착잡하기까지 할 때.
그들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린 이들이 건물 옥상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 명령어는 불필요하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쏴.
탕!
미덴에는 현재 두 나라가 얽혀 있었으니 둘 중 어느 나라와 화평을 위한 조약을 맺든 남겨진 나라는 그들을 경계하고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간신히 맺은 평화, 예를 들어 포로 교환 및 송환 현장을 방해하고 급기야 그들을 사살하기까지 하는, 이러한 평화를 깨뜨리는 급진적인 움직임은 어느 쪽 손이든 다시 싸움을 일으킬 명분을 쥐여주기엔 충분했다. 안다, 이는 굉장히 얄팍한 수였다. 하지만 사람은 얄팍한 명분으로도 충분히 대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 이 땅, 이 별에서 일어난 많은 전쟁이 실로 그랬다.
죽은 자는 이 이상의 피를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 그대로 모르기에 실은 복수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이다.
죽은 자의 이름을 빌려 썼을 때부터 적의는 이미 죽은 듯이 숨죽이는 태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영지로 돌아가,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속상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을 진정시키고, 재미난 만남이 있었어. 자, 이제 추격하자. 명령하며 고개를 돌린다. 오늘날에는 돌리지 않는 고개. 가늠쇠를 목표물에 맞추고 방아쇠를 당긴다.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수 시간은 이곳에 잠복해 있었던 듯하다. 실은 그 배가 되는 시간을 오래전 그날로부터 기다린 것이기도 하지만, 이 이상의 시간은 굳이 숫자로 헤아리지 않기로 한다. 모두를 위해서.
조준경 너머로 눈이 마주치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난다.
알았을까요? 저 사람은.
글쎄. 그땐 일부러 트리거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알든 모르든 이제 와 무슨 상관일까. 미덴의 병사는 무전에 대고 짧게 명령한다. 긴 명령어는 불필요하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