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강변, 자전거
- gwachaeso
- 3월 28일
-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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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타치카와가 블랙 트리거가 된 세상
교통사고 묘사 주의
진학 생각은 전혀 없는 줄 알았는데, 졸업하면 무얼 할 거냐는 질문에 ‘학교 가야지, 또.’라고 대답하는 걸 듣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웬 학교요?’ ‘웬이라니,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집에서 가라고 해서. 대학.’ 아마 그는 저와 같은 말을 이미 입 밖으로 내뱉어 본 모양이었다. 집에서, 그리고 어쩌면 보더에서. ‘계속하고 싶으면 대학 졸업장은 따라고, 그 자리에서 약속하라길래, 그러겠다고 했지. 뭐.’ 그러고 보면 최근 미카도 시립대학에 보더 특별 전형이 신설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아마 보더와 어떤 제휴 관계가 맺어진 것일 테고, 당신은 그 제도의 영광스러운 첫 수혜자가 된다는 사실에 시큰둥해 보였다. ‘아니면 안 갈 생각이었어요?’ ‘갈 성적으로 보이냐, 내가.’ 특별 전형이 아니면 대학 문턱에 발을 올리지도 못할 성격이라며 손을 저은 그는, 니노미야에겐 필요하지도 않을 전형일 거라며 이 자리에 없는 동갑내기 동료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대로 양손으로 잡고 타요. 넘어질라.’ ‘이 정도론 안 넘어져.’ ‘그래도요.’
오늘은 타치카와 부대가 비번인 날. 오랜만에 부 활동에 얼굴도장을 찍고 나왔더니 쿠니치카가 강변으로 소풍을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메시지가 휴대전화에 도착해 있었다. 일정도 없고, 나쁠 건 하나도 없었기에 과자야 근처 편의점에 들러 사기로 하고 자전거 보관소로 발을 옮겼다. 타치카와와 마주한 건 거기서였다. ‘메시지 받았냐.’ 고개를 끄덕이면 제 자전거의 잠금을 푼 타치카와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가자.’ ‘잠깐만 기다려요.’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탄 지는 좀 오래되었다. 고개를 돌리면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로 붉게 물든 강물과 반짝이는 윤슬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하는 대화가 곧 다가올 입시라니. 물론 보더 특별 전형을 노린다면 진학에 그리 부담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궁금하기는 하였다. ‘있잖아요, 타치카와 씨.’ ‘왜?’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그에게 물었다. ‘만약에, 대학에 가기 정말 싫으면요.’ ‘지금도 좋지는 않아.’ ‘아무튼 그러면요. 보더를 그만둘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타치카와 씨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가 보더를 그만두길 바라서? 그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채로 그 속내에 있던 질문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너는 내가 보더를 그만뒀으면 좋겠어?”
아이고, 이건 또 무슨 소리람. 그럴 리가 있겠냐고. 당신이 그만두면 어떡하냐고.
“…….”
말해야 하건만.
앞서가던 그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전거를 멈춰 세운 탓에 이즈미도 자전거를 멈춰야 했다. 그럼에도 아직 내리지 않은 그와 달리, 잠시 눈 돌린 사이 그는 아예 자전거에서도 내려 이즈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기억 속 가장 어린 타치카와가 이즈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수염도 기르지 않은, 다듬지 않은 머리가 좀 더 자유분방하게 뻗은, 가장 어린 당신이 나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이즈미는 그제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뇨.”
그는 그러면 되지 않았냐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즈미는 순간 그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지만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은 그로선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내릴 순 없었다. 이즈미는 계속 가야 했다. 타치카와처럼 중간에 내리거나 할 순 없었다. 꿈이라도. 아니. 꿈이니까.
꿈에서는 교통수단을 함부로 타거나 내려선 안 된다는 법칙이 있다지 않나. 그래서.
“계속 보더에 있길 바라요.”
“계속 보더에 있어.”
“제법 웃기는 농담이었어요. 타치카와 씨.”
“웃지도 않았으면서.”
그는 웃는다. 그가 웃으니 멀리서 두 개의 라이트 불빛이 다가온다. 덤프트럭이다. 자전거 도로에 덤프트럭이라니. 웃기는 설정. 웃기지 않은 꿈. 그리고 순식간에, 그를 쳐서 날려버린다. 보이지 않게. 흔적도 없이.
그럼에도 목소리는 들려온다. 허공에서.
어느 날엔 그조차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
“그날 내가 보더를 그만두었더라도 내가 죽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어.”
“교통사고라던가, 질병이라던가, 그 외 사고사라던가, 사건이라던가 말이죠. 타치카와 씨.”
“잘 알고 있네. 이즈미.”
“하지만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죽음은 없었을 것 같네요. 그중에서.”
목소리뿐이기에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신랄하게 비꼬자니 웃음소리는 들려와 당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래. 그건 그렇죠? 그래. 그렇지만.
“살아 있어도 입시 상담 역은 제대로 못 했을걸.”
“죽어 있으면 그조차도 못해요.”
어쩌겠어. 그래요. 어쩌겠어요.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예 몸을 돌려 강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붉게 진 노을과 반짝이는 윤슬.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다 툭 하니 말을 뱉었다.
“어태커를 영입하기로 했어요.”
“오, 누구든 나보단 못할 텐데.”
“그렇겠죠. 지금은.”
하지만 별수 없었다. 과거, 타치카와는 아즈마 부대를 이기기 위해 슈터로 저를 영입했지만, 이즈미는 1위를 다시 찾기 위해 그의 버금 가는 어태커조차 그의 부대로 데려올 수 없었다. 진이나 카자마를 그의 부대로 영입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러니 별수 없지. 별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핀잔을 준 뒤 한참 말을 삼켰다. 숨을 삼켰다. 그리고 더는 삼킬 수 없어졌을 때 토해내었다. 숨을, 말을.
“이 꿈은 언제까지 계속되나요?”
숨은 말을. 꿈인 걸 깨달았을 때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젠 깨어나고 싶어요.”
축축해진 뺨에 언젠가의 가을 공기가 와 닿고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 나도 몰라. 이건 네 꿈이잖아.”
아, 무책임한 발언. 무책임하지만 사실인 발언. 그렇지만 반박할 수 없다. 꿈은 산 사람이 꾸는 것이니까.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꿈꿀 수 없으니까.
“그러게요. 내 꿈이죠, 이건.”
전부 이즈미의 꿈이다.
전부. 나의 꿈.
어둠이 내리고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와 반짝일 때쯤에야 그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특별 전형 외 다른 전형을 노리자니 입시 스트레스가 심하긴 한 것 같았다. 개꿈을 다 꾸고. 뺨을 닦은 이즈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