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의 장원 까마귀의 객
- gwachaeso
- 3월 28일
- 8분 분량
<WT>
리퀘스트
십이국기 AU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왕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맹세할 것을 서약합니다.”
“허락한다.”
보도궁에서 성대하게 진향을 하고 여선의 의복이 화사해지면 봉산에 축제의 때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봉산의 입구로 모이는 세 방향의 길은 황해를 관통하여 이어지고, 요마와 요수의 소굴을 뚫고 온 사람들은 봉려궁 문 앞에 천막을 친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결의한 자, 왕이 될 만하다고 추거된 자, 그들을 수행하는 자들로 붐비는 모습을 현재 이 봉산에 혼자 남은 린(麟)인 코나미 키리에는 올해로 열일곱 해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지루해 뵈는 모습을, 평소보다 호화스러운 옷을 걸치느라 바닥에 끌리는 치맛자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쪼그려 앉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열일곱 해 전 봉려궁의 미로 안쪽에 숨겨진 사신목에는 기린의 열매, 태과가 열렸다. 린을 품은 난과였다. 두 해 전엔 기(麒)가 열렸던 사신목이었고, 당시엔 아직 왕을 찾지 못해 봉산에 머무르고 있던 어린 기 아라시야마 쥰은 열 달 동안 익은 과실에서 태어난 코나미 키리에를 제법 예뻐하며 동생처럼 여겼더랬다. 코나미 키리에도 그를 곧잘 따랐다. 두 마리의 기린이 함께 봉산에 머무르기란 꽤 오랜만의 일인지라 여선들은 두 봉산공을 모시느라 바삐 움직이면서도 얼굴에서 웃음을 잃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을 흐리는 날도 찾아오고 마니, 그때도 지금처럼 봉산엔 축제가 열렸다. 하지, 지일(至日)이었다. 아라시야마 쥰이 왕을 찾은 날은. 코나미 키리에는 그가 안합일에 맞춰 승산한 어느 장군 앞에 전변하여 자신의 뿔을 가져다 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의 서약이었다.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왕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맹세할 것을 서약합니다.’ 그럼 왕이 될 자가, 아니, 이미 왕인 자가 이렇게 말하면 되었다. ‘허락한다.’ 왕을 찾은 아라시야마 쥰은 활짝 웃으며 기뻐했는데 코나미 키리에는 그가 태어난 이래 오라비, 그보단 벗에 가깝게 함께 지내온 그가 그보다 더 기쁘게 웃은 날, 환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다소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비록 아라시야마 쥰의 왕 시노다 마사후미는 코나미 키리에에게도 정답게 웃어주며 호감을 샀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코나미 키리에의 왕은 아니었다. 그에겐 코나미 키리에가 보아야 할 왕기가 없었다. 하지만 아라시야마 쥰에게는 보였던 모양이지. 그에겐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모실 왕의 왕기가. 코나미 키리에는 왕과 함께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이윽고 봉산에는 린 혼자 남게 되었고, 코나미 키리에는 유일한 봉산공이 되었다.
그 뒤 열 해는 더 지나 지금이 되었다. 코나미 키리에는 아직도 제 왕을 찾지 못했다.
부러 찾지 않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코나미 키리에도 찾을 수 있다면 그의 왕을 당연히 찾고 싶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코나미 키리에는 그의 왕을 부러 찾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찾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지는 않았다. 기린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수였다. 코나미 키리에에겐 당연히 그 존재가 가져야 할 자부심과 존엄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사촌 아라시야마 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떠났다. 왕 앞에 엎드려 절한 뒤 왕과 함께 떠났다. 코나미 키리에는 그 모습을 보며 축하해주고, 기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론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가족이지 않았나. 가족이지 않은가. 다행히 그의 왕 시노다 마사후미는 혼자 남은 코나미 키리에를 염려하는 아라시야마 쥰에게 봉산에 다녀와도 좋다는 허락을 몇 번이나 내어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봉산에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재보는 왕을 보조하는 한편 도읍지의 주후로서 정무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언젠가 코나미 키리에가 져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코나미 키리에가 왕을 선정하여 태보로 불리는 날이 오면 그 역시. 제 앞에 태어난 모든 기린이 졌던 의무를 그 역시 지게 되리라. 자신을 통과하는 천계로 찾은 왕 앞에 평복하는 의무와 같이, 이 역시. 그러나 그날은 언제 오는가? 열일곱 해째 코나미 키리에는 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승산하는 이들 중에 어떻게, 한 명도 왕이 없을 수 있는가? 말이 되는가?
“내 탓이야?”
“절대 아닙니다. 봉산공의 탓일 리가요.”
다만 왕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또는, 태어나 자랐으나 승산할 마음을 갖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전자면 어쩔 수 없겠으나 후자면 퍽 곤란하였다. 코나미 키리에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기울고 요수가 들끓고 있는데도 왕이란 인간이 배짱 하나가 없어서 열일곱 해째 승산하지 않고 있단 말야? 물론 그가 승산하지 않은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승산하려 했으나 그 길 가운데 운 나쁘게도 요수에게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왕이 끼어 있는 승산길은 보통 다른 때보다 훨씬 안전하고 평안하다고들 하지만……. 모름지기 절대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럼 코나미 키리에는 어쩌면 좋을까? 그의 왕이 죽었다면 새 왕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언제 태어날 줄 알고? 그때까지 코나미 키리에는 그를 기다리며 살아있을 수 있을까? 수명을 다하고 죽지는 않을까? 왕을 찾지 못한 채로?
하지가 되니 보도궁에서는 성대하게 진향을 하고 여선의 의복은 화사해지고 봉산에는 축제가 열린다. 하나밖에 없는 봉산의 입구로 모인 사람들은 봉려궁 문 앞에 색색의 천막을 친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결의한 자, 왕이 될 만하다고 추거된 자, 그들을 수행하는 자들. 이들 중에 과연 코나미 키리에의 왕이 있을 것인가? 이번에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었다. 하지만 코나미 키리에는 그를 본 순간 소리치고 말았다.
“싫어!”
올해로 치세 400년을 이룬 왕 타치카와 케이의 나라는 코나미 키리에가 태보가 되어야 할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열일곱 해째 왕을 찾지 못해 들끓기 시작한 요마는 그의 나라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었으니 왕을 찾지 못한 기린의 문제는 비단 기린 혼자나 그의 나라의 문제를 넘어 타치카와 케이 또한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왕이 타국에 간섭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기린과 함께 칠공분혈하여 죽을 역천의 죄였다. 400년째, 즉 즉위한 이래 줄곧 ‘나라를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할 왕’이란 소리를 듣고 있는 타치카와 케이는 당연하지만 지난 400년 동안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태보 이즈미 코헤이와 목숨을 버리고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방도도 모색하지 않고 기린이 왕을 찾을 때까지 무작정 버틸 수는 없는 노릇. 그럼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개입에는 편법이 있다 한들 분명한 선이 있었다.
춘분이 지난 뒤 타치카와 케이가 제 신하인 카라스마 쿄스케를 불러 명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카라스마 쿄스케는 오래전 그의 부모가 요마를 피해 타치카와 케이의 나라로 망명하여 이곳에 온, 그런 뒤 이곳의 관직에 오른 사람이었다. 타치카와 케이는 400년째 그의 나라를 이끌고 있으니 분명 명군이나 또한 격식을 차리지 않기로 유명한 왕이기도 했다. 옥좌에 대충 걸터앉아 턱을 괸 그의 왕 앞에 부복한 카라스마 쿄스케는 일어나라는 손짓에 냉큼 일어나 먼지가 묻은 무릎께를 털었다. 왕과 가까운 신하들은 왕만큼이나 그의 앞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기로 또한 유명했다. 이즈미 코헤이는 이제 왕에게 한 소리하기도 지친다는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물론 그 또한 격식을 차리는 데는 관심 없었다. 상하 간 예의와 범절을 중시하는 나라를 찾으려거든 이웃의 니노미야 마사타카가 다스리는 나라를 찾으라. 적어도 타치카와 케이의 궁에서 찾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도한 자를 내버려두는 왕이란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카라스마 쿄스케에게 그러한 왕이 명했다. ‘네가 한번 올라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봐.’ 그 말에 이즈미 코헤이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는데, 왕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기린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기린이 왕을 찾지 못하는 건 왕이 기린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린은 왕을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생물이다. 어떤 형태를 갖추었다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왕기를 느낀 순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어떤 왕이 될지 짐작되어도. 그렇게 제 왕을 찾아냈던 기린이 이즈미 코헤이 자신이 아니던가. 이 사람이 왕이 되면 어떤 국정을 펼칠지 알 것 같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어 그의 발치에 뿔을 대었다.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왕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허락한다’라는 말이 들렸을 때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지금까지 기린이 왕 앞에 맹세의 말을 읊었을 때 이를 거절한 왕의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타치카와 케이 또한 그러했다. 그렇게 그는 왕이 되었다. 이 나라의, 이즈미 코헤이의.
오만한 왕의 이야기는 봉산에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모든 기린이 그러하듯 이즈미 코헤이 또한 봉산의 태과에서 태어났고, 어린 기를 아낀 모든 여선은 왕을 찾아 직접 봉산을 내려간 이즈미 코헤이가 타치카와 케이와 만나 벌어졌던 모든 일을 그의 여괴로부터 전해 들었고, 분노했고, 타치카와 케이와 마주한 순간 짜증을 냈지만 선정이 끝났으니 돌이킬 수도 없거니와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왕의 선정은. 타치카와 케이는 그저 넉살 좋게 웃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여선들의 성질을 더욱 긁었음을 입 아프게 여러 차례 말할 필요는 없다. 물론, 어떤 왕을 고르시든 그것은 기린에게 내린 천제의 뜻이지만, 그렇지만 기왕이면 보기 좋은 과실이 먹기도 좋다고 가능하면 인성도 성격도 괜찮은 왕을 고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어린 아라시야마 쥰과 코나미 키리에가 입이 가벼운 여선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 여선은 입이 어찌 그리 가볍냐며 선임에게 호되게 혼이 났지만, 저희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언젠가 봉산을 찾아온 이즈미 코헤이에게 물었을 때, 이즈미 코헤이는 거짓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코나미 키리에가 타치카와 케이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선입견을 품게 되는 지금을 만들고 만다. 저는 왕이 되려 승산한 것이 아니옵고 제 왕의 전갈을 전하기 위해 왔을 뿐이란 카라스마 쿄스케의 말은 코나미 키리에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장난해? 장난하냐고! 무덤덤해 보이는 카라스마 쿄스케에게 코나미 키리에는 결국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홧김에 외치고 말았다. 무어라 말했냐면,
“중일까지 무탈하든가 말든가!”
‘아이고, 코나미님!’ 홱 고개까지 돌리면 뒤에서 그를 따르던 여선들과 그들과 함께 은복해 있을 여괴가 ‘코나미님이 또 코나미님 했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치는 모습들을 보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카라스마 쿄스케는 그러든 말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제게 축언을 해준 코나미 키리에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금까지 코나미 키리에에게서 ‘중일까지 무탈하라’는 인사를 들은 사람은 당연히 발에 챌 정도로 많았으나 진노까지 산 사람은 아무래도 없었기에 카라스마 쿄스케는 곧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코나미 키리에가 알 바는 아니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그날은 더는 사람들의 배알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봉려궁으로 돌아간 코나미 키리에는 곧장 침상으로 돌아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싫어! 왜 저런 애가 왕이야? 왜 왕이냐구!
“키리에.”
그다음 날도 알현을 받지 않자 걱정이 든 여선들이 주작을 보냈는지, 아니면 때마침 오던 길이었는지 이튿날 아라시야마 쥰이 봉려궁에 들어 코나미 키리에를 만났다. 코나미 키리에는 그때까지도 제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였다. 별궁으로도 이동하지 않아 여선들만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코나미 키리에의 소리 죽이지 않은 외침을 통해 그들은 이미 코나미 키리에가 왕을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왕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기린이라니.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리다. 하지만 끝까지 왕을 무시하고 떠나보낸 기린은 기록된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봉산공께서 그 첫 번째 기린이 되시면 어떡하지? 봉산의 신선들을 관리 감독하는 아즈마 하루아키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들을 얼렀지만, 그들은 아즈마 하루아키를 신뢰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불안한 마음을 남겨두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모시는 기린에게 결점이 있으리란 생각 따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왕에게 있으리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쥰.”
“왕을 찾았다며? 축하해.”
다른 여선들의 축하에는 이렇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비록 얼굴은 울상이었지만 코나미 키리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라시야마 쥰이 건네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아직 봉산을 내려가진 않았지?’ 이는 날마다 카라스마 쿄스케를 남몰래 살피는 여선들이 알려주어 알 수 있었다. ‘그렇대.’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를 것이다. 제가 왕이라는 것을. 코나미 키리에의 ‘중일까지 무탈하라’는 축언은 다시 말해 ‘당신은 왕이 아니니까 잘 돌아가라’라는 작별 인사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왕이라면 그 자리에서 평복하여 선언했겠지. 그래서 지금까지 울상이 되었던 자는 코나미 키리에가 아닌, 코나미 키리에의 인사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코나미 키리에가 울상이 되어 있었다.
“네 왕이 싫어?”
“무릎 꿇는 게 싫어.”
“하하.”
물론 코나미 키리에도 오직 그에게만 무릎 꿇으면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린은 천제와 서왕모의 사당에서도 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해져 있었으므로, 제 왕이 아닌 자들에게는 무릎을 꿇고 싶어도 꿇을 수 없는 생물이었다. 코나미 키리에는 아라시야마 쥰의 왕 앞에서도 꼿꼿이 서 있을 수 있었다. 반대로 아라시야마 쥰 역시 코나미 키리에의 왕 앞에서 무릎 꿇지 않아도 되리라. 꿇을 이유도 없겠지만, 강제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기 전엔 붙잡을 거지?”
“그래야겠지…….”
“아니면 붙잡아 와야 할 테니까.”
그건 또 그랬다. ‘괜찮아. 네 선택은 틀리지 않으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않을 거니까’ 같은 불확실한 말은 하지 않는 아라시야마 쥰이었다. 코나미 키리에도 알고 있었다. 기린이 선택하는 것 그 자체가 천계인 것을. 코나미 키리에의 선택은 틀릴 수가 없는 것을. 그가 그의 왕인 것을. 사실 코나미 키리에도 불안해한 적은 없었다. 내가 기린인데, 틀릴 리가 있겠어? 단지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제 왕이. 그래서 아라시야마 쥰에게도 그런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쉽게도, 그렇지만 잘된 일이게도 시노다 마사후미는 제법 훌륭한 왕인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는 아라시야마 쥰의 말에 코나미 키리에는 한숨을 폭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마침내 코나미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아라시야마 쥰은 다가오는 여선의 만류를 웃으며 제지하고 손수 코나미 키리에의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가자.’ ‘응.’ 카라스마 쿄스케는 내일 동이 트기 전 하산하여 그의 조정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늘은 그 짐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리다. 코나미 키리에는 그걸 방해할 것이다. 그는 그의 조정으로 다신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못 하게 막을 것이다. 코나미 키리에는 그럴 자격이 있었고, 그럴 의무가 있었다. 천명이고, 천계였고, 천의였다. 코나미 키리에의 뜻은.
오랜만에 봉려궁에서 밖으로 나온 코나미 키리에를 본 모든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들을 지나쳐 성큼성큼 발을 내디딘 코나미 키리에가 카라스마 쿄스케 앞에 멈춰 섰다. 코나미 키리에를 발견하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던 카라스마 쿄스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코나미 키리에는 잠시 후 신선이 아닌 자들 앞에선 처음으로 전변하여 위용 넘치는 기린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음엔 고개만 숙였던 이들이 이제는 땅바닥에 팔을 대고 엎드리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저희가 본 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신수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저자가 저희의 왕이 될 자라는 것도.
코나미 키리에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굳이 전변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코나미 키리에 나름대로 그의 왕에게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왕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맹세할 것을 서약합니다.”
잠시 후 카라스마 쿄스케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코나미 키리에가 파득 몸을 떨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도 돌아가 카라스마 쿄스케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해……?’ 손끝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거절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코나미 키리에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선 여선들과 지켜보고 있던 아라시야마 쥰까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 얼어붙은 모든 사람 앞에서 카라스마 쿄스케가 입을 열었다. ‘저는 처음부터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너……!’ 코나미 키리에가 다시 전변하여 그를 뿔로 들이박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기린은 본디 나기를 자비의 생물로 나지만 코나미 키리에는 이 녀석에게는 자비를 베풀 수 없겠다고 다짐했고, 그때였다. 카라스마 쿄스케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거짓말이에요.”
“뭐……?”
“정말 잘 속으시네요.”
‘듣던 대로.’ 그 말은 분명 타치카와 케이와 이즈미 코헤이에게서 들었으리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코나미 키리에는 ‘허?’하며 카라스마 쿄스케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카라스마 쿄스케는, 역시 이 사람은, 아니, 이 기린은 이런 모습이 더욱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만다. 왕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기린의 사명이고 숙명이지만 그럼에도 저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쉽게 무릎을 내어주지 않는 고고한 모습이 눈앞의 이에게 더욱 잘 어울리리란 생각을 하고 만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만다. 그래서 감히 그런 장난을 치고 만다. 그래도 장난은 여기까지 쳐야 하리다. ‘죄송해요. 이렇게 인사하면 되는 거죠?’ 그리고는 손을 내민다. 잡으라는 것처럼, 그거면 충분하단 것처럼.
“허락한다.”
코나미 키리에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