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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While (1)

  • gwachaeso
  • 3월 27일
  • 9분 분량

<WT>

루프물



1. 아라시야마, 진



진. 너의 눈에도 보일 거야. 아라시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말대로 진의 눈에도 보이고 있었다. 아라시야마와, 그와 겹쳐 무너지는, 그보다는 부서지는 세상이 보이고 있었고, 조금 후 미래의 그들에게 그 미래가 닥쳐올 것이, 진의 눈, 시야, 또 다른 ‘스크린’, 다시 말해 미래시의 화면에 선명하게 상연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참 따스했어. 그렇지? 그러니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걸 이해한다며 아라시야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타치카와 씨가 블랙 트리거가 되지 않고, 미와가 누나를 잃지 않았으며, 이코마 부대가 미즈카미 부대로 재편되지 않고, 내 동생들이…… 살아있는 세상. 이 세상이 이토록 따뜻한 이유는 네가 그러한 바람을 품었기 때문이겠지. 진은 반박할 수 없었다. 반복되고 있는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불행이 거세된 세상. 가장 행복한 미래만을 골라 실현한 세상. 그러지 못한 미래를 살게 된 미래의 진 유이치가 마더 트리거에 접속하여 만들어낸 가상의 세상. 본디 보더의 마더 트리거로는 이만한 출력을 낼 수 없었다. 마더 트리거로도 이만한 대체 우주를 만들어낼 순 없었다. 자신을, 살아있는 블랙 트리거로 취급하여 모든 트리온을 쏟아붓지 않는 한. 스스로 신이 될 작정으로 마더 트리거에 뛰어들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 끝에서 가까스로 만들어낸 작은 세상이었다. 미카도시 전역을 커버하지도 못한, 보더 본부를 포함하여 둘레의 시내, 그 좁은 영역에서만 반복되는 대체 현실. 보더 본부가 집어삼켜졌기 때문에 본부의 엔지니어들은 이에 대처할 수 없었다. 따라서 각 지부, 특히 엔지니어를 보유하고 있는 타마코마 지부에서 그들의 가족인 진 유이치를 멈추기 위해 벌인 일련의 공작들이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진상이었다. 더 삼켜졌다간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그대로 마더 트리거에 종속되어 산 채로 죽은 채와 다름없이 되는 신이 되리라. 사실 진도 그런 결과를 바라진 아니했다. 그는 단지, 단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면 좋을 세상을 실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생각 외로, 만들어진 세상이 너무 따뜻해서. 제 기억 속 정보를 조합해 낸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모가미가 살아 있는 세상을 무너뜨릴 수가 없어서. 그 당시 본부에 있던 카키자키와 유바는 직접적으로 깨닫진 못해도 반복되는 세상에서 몇 번이고 세상의 모순을 지적하고 이상을 언급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도 미묘한 지점에서 감이 날카로웠던 이코마는 무언가를 깨닫고 진을 멈추려 했지만 미즈카미가 번번이 방해한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을 보며 아라시야마는, 조용히 접근하기로 했다. 진에게. 이 모든 것이 진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을 알아 진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고 꿈을 꾸는 세상의 꿈을 깨뜨리기 위하여 오늘날 이 지점에 이를 때까지 숨을 죽이고 또 죽이며 지척까지 접근해 왔다. 암약은 네 특기지만 나도 제법 나쁘지 않았지? 웃는 친구를 바라보며 진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진. 너의 눈에도 보일 거야. 고개를 흔들며.


진. 그러지 마. 살아야지. 그렇게 말하지 마. 그 말은 제 손을 마지막으로 꽉 잡았던 모가미도 했던 말이다. 살 수 있어. 아직은. 아직은 끝나지 않은 문장의 문단의 흐름을 끊어내고 마더 트리거의 접속을 끊어낼 수 있었다. 아직은 사이드 이펙트가 그러한 탓에 남들보다 배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생각하며 자라야 했음에도 결국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의 비행을 여기서 멈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면 그가 견뎌야 할 비극도 딱 그만큼만 주었어야지.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하려면, 열아홉 살이 견딜 수 있는 비극만 주셨어야지. 하지만 열아홉 살이면 견뎌지는 비극이란 또 뭔가? 열아홉 살이면 견딜 수 있게 되는 비극이란 뭔가? 아직은 살 수 있어, 진. 그렇게 말하지 마. 살아야지, 진. 제발 그렇게는 말하지 마, 아라시야마. 난 아직 모르겠단 말야. 아직은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단 말야. 실력파 엘리트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난 아직. 아직.


널 구하는 방법을 보지 못했단 말야.


그 말에 쓴웃음을 짓는 아라시야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미래에,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까지 싸울 방법을 찾던 청년은, 모두를 확실하게 구할 방법을 찾았다. 블랙 트리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블랙 트리거보다 더 확실하게, 분명하게, 모두를 구할 방법을 찾아냈다. 찾아내어…….


유언을 남겼다.


내가 더는 싸울 수 없게 된다면 마지막까지 나를 이용해 주세요.


네가 제일 너무해. 아라시야마.

미안해. 진.

네가 미워. 쥰.

미안해. 유이치.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서지기 시작했다. 접속이, 연결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아라시야마가 진을 가로막고 시간을 끄는 동안 타마코마 부대는 본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진을 끌어내고 있다. 마더 트리거에서. 대체 현실이 다시 대체되기 시작한다. 현실로. 진짜 현실로. 세상으로. 진짜 세상으로. 진.


너의 눈에는 꼭 보일 거야.

여기선 보이지 않을 거야. 그건 분명해. 확실해. 그러니까 나가서 봐. 그때까지.

기다릴게.


천장이 무너진다. 그의 머리 위로 언젠가처럼 콘크리트 조각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니, 콘크리트기 아니다. 세상이다. 떨어지는 세상의 조각과 함께 떨어지며 말했다.


기다려 줘.




2. 이코마, 미즈카미



오늘도 결국 이 자리에. 이코마는 자신을 가로막은 미즈카미를 바라보며 섰다. 미즈카미. 어디 가세요. 진에게. 시기가 이때쯤 오면 미즈카미는 숨기는 게 없어졌다. 끝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그래서 풀어진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절대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이것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시기의 미즈카미는 이코마를 다소 버르장머리 없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태도로 대했다. 돌려 말하는 대신 직접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이코마의 요구는 거절했다. 실은 다 듣고 있으면서 들어보지도 않는 척, 지금처럼 말을 끊고 강압적으로 나섰다. 가지 마세요. 돌아가세요. 갈 거다. 돌아가지 않아. 그러나 이코마는 그에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곧바로 호월의 검집 위로 손을 올린다. 비켜라, 미즈카미. 안 비키면 벨 거예요? 그래. 웃지도 않고 단숨에 대답한다. 자세를 잡는다. 그에 미즈카미는 웃는다. 보면 아시잖아요. 저 지금 트리온체도 아니에요. 이코 씨. 절 죽일 겁니까? 그 말에 이코마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미즈카미.


그 수는 저번에 당해서 안 당한다.


평상복을 입은 차림으로 트리온체를 교체한 후 아스테로이드를 쐈던 지난 회차의 미즈카미를 이코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본래 육신인 줄 안 미즈카미를 부상 없이 제압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움직인 것이 패인이었다. 트리온체 대 본래 육신이라면 트리온체가 이길 수밖에 없고, 그날의 미즈카미는 무리 없이 제압한 이코마를 내려다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떨어뜨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이코 씨. 진 씨가 다시 한번 세상을 되돌릴 때까지. 그때까지만 버티고 놓아드릴게요. 그때가 되면 이코마는 다시 베일 아웃용 침상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일어날 것이다. 밖으로 나가면 호소이가, 미나미사와와 오키가, 미즈카미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존점 2점 추가예요. 그리 말하면서.


수싸움에서 미즈카미를 이길 방도는 많지 않다. 그러나, 상대가 이코마이기에 미즈카미가 쓸 수 있는 수는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미즈카미가 미즈카미고 이코마가 이코마라 하더라도 지금껏 나온 모든 수를 다 외워버린다면 대응하지 못할 것도 없다. 자세를 잡고 선 이코마를 보며 미즈카미가 처음으로 웃는다. 이래서 어렵다니까요. 오키도, 카이도, 마리오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왜 이코 씨는 항상 중간에 깨닫고 마는지. 이코 씨.


진 씨에게 간다는 게, 가서 이 세상을 무너뜨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알아. 정말로 알기에 그리 대답했다. 그걸 알아 미즈카미는 세상보다 먼저 무너진다.


다시 물어볼게요. 이코 씨. 이 세상을 벗어난다는 게.

제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세요?


말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갈라지는 육신이다. 본디 미즈카미에겐 이코마를 이길 방도가 없었다.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 그가 속지 않는다면 그를 멈출 방법이 없었다. 그래.

안다.


선공, 호월. 갈라진 육신보다 더 사무치는 건 갈라진 마음일 수밖에 없다. 진짜 너무하시네요. 이코 씨.


더는 버티지 못하고 트리온체가 무너지면 본래 육신도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무릎을 꿇는다. 이 세상엔 풍인이 없다지만 진 씨와 싸워서 이기실 수 있겠어요? 해 봐야지. 해서 안 되면요.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지. 또 잊어버리실 텐데요. 또 기억해 낼 테니까 괜찮아. 저는.


계속 방해할 거예요. 다음에도.

계속 방해해라. 미즈카미.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쳐 봤자 소용없을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미즈카미에게 위안이 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그는 절대 자신을 ‘대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장은 그 자신이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엔 미즈카미 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즈카미는 대장이 아니고, 아니어도 된다.


그럼 어디 이코 씨 뜻대로 해 보세요.

대장이니까.


그 말에, 단 한 번 되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친다. 한 번도 웃지 않은 그가 그에 말한다. 미즈카미.


다녀올게.


그예 주저앉은 채로 손을 흔들고 만다.


올 때 기념품 사 오세요.



눈을 뜬다.


사위는 깜깜하지만 곧 어둠에 적응한 눈이 모든 것을 바로 본다. 밖으로 나서면 호소이가, 미나미사와와 오키, 미즈카미와 함께 그를 기다리며 서 있다. 미즈카미가 일어난 그를 발견하고 웃는다.


기념품은 생존점이네요.


기념품?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리 중요한 단어는 아닌 듯해 금방 잊는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어차피 다시 기억해 낼 테니까.




3. 나스, 쿠마가이


어쩌면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좀 더 알기 쉬웠던 건지도 모르겠어.

마지막 순간 생이 부유하는 느낌 말야.

그대로 끝인 줄만 알았기에 이질감을 크게 느끼는지도.

신기해, 조금.


레이. 미안. 나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러나 그 말에 나스는 고개를 저을 뿐 쿠마가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야 한다는 듯이 입가에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어 올렸다. 괜찮아. 이해해. 오히려 안심이야. 쿠마는 몰랐으면 하는 감각이니까. 가능한 한 영원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오래오래. 모르길 바랐다고 말하는 나스를 쿠마가이는 바라본다. 가느다란 난간에 걸터앉은 그가 떨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트리온체로 있기 때문일까? 트리거 안에는 그런 그의 진짜 육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진짜, 육신. 발음하는 것은 혀가 아닌 생각인데 떫은 감이라도 혀에 닿은 양 오그라드는 혀가, 말려드는 혀가 이다음에 이어질 소리를 막았다.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는 소리를, 말을. 그사이 말을 잇는, 말을 마치는 나스였다. 끌었던 말을 내려놓는다. 쿠마. 나는.


네가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그 순간 말려든 혀가 풀리며 기도로, 폐로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때가 바로 이때임을 알고 쿠마가이는 소리친다. 레이, 난! 나도! 네가.


오래오래 살길 바랐어.


말하는 순간 깨닫는다. 이상을 느끼고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다. 이상? 아니, 이질감.


이질감을 안기는 부분을 잘라내기 위해 잘라낸 말의 나머지를 반복했다. 살길 바랐어. 앞이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뒤인가? 뒤도 마저 잘라내고 붙여 말한다.


살기를.


그 말은 참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지금은 살아있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린다. 바람은 결국 바람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불려 왔을 때와 같이 불어 사라졌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머리를 엉망으로 흐트러뜨리는, 옥상이라 더욱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야 나스의 눈과 눈을 마주친 쿠마가이가 중얼거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어, 쿠마.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야, 이게?

내가 바라지는 않은 일이었어. 이런 건.

왜 바라지 않았어?


레이. 쿠마. 울지 마. 어느새 난간에서 내려온 나스가 쿠마가이의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린다. 닦아내려 해도 더욱 번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리라. 이 순간에야 저희가 진정으로 재회했다는 걸 안 쿠마가이가 나스의 양팔을 붙잡고 그대로 몸을 무너뜨린다. 무릎을 꿇으면 나스의 몸도 함께 끌려 내려갈 수밖에 없다. 레이. 쿠마.


부탁이 있어.

레이 너의 부탁이어도 들어주고 싶지 않아.

들어줘, 쿠마.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모독 되길 원하지 않아. 그 말에 쿠마가이는 고개를 들어 나스를 올려다보았다. 나스는 다시 한번 쿠마가이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도와줘, 쿠마. 내 생을. 내 말을. 내 끝을.


돌려놓아 줘.


그것이 ‘레이’의 부탁이라면 ‘쿠마’는 거절할 수 없었다. 들어주고 싶지 않아도 들어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 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쿠마는.



그러나 얼마나 진심인지는 상관없는 것이지.

승부를 결정하는 건 전력, 전술, 그리고 운.

기합으로 어떻게든 되는 건 실력이 상당히 엇비슷할 때뿐.


그와 쿠마가이의 실력은 비슷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분명하게도.


마더 트리거를 지키고 선 자가 있을 줄은 예상하였다. 높은 확률로 진 유이치. 아니라면 그 다음으로 그와 이해가 일치할 사람들. ‘이코마 부대’의 미즈카미 사토시라던가……. 하지만 그는 쿠마가이의 예상에서 벗어난 인선이었다. 생각하면 경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이유도 없진 않았다. 레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며 접근했던 이코마도 나스와 의견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방심하고 말았지만, 생각하면 방심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절대로.


일격은 피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쩌적 소리와 함께 금이 가는 팔로 다른 팔을 붙잡으며 입술을 꽉 깨문다. 참으로 감쪽같았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숨긴 적은 없어. 다들 나한테는 묻지 않았을 뿐이지.


그 말에 대답하는 남자다. 어쩌면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알기 쉬웠던 건지도 모른다.


여기선 그만 돌아가 줘야겠어, 쿠마.

……저번에도 여기까지였나요? 내가?


응.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말하며 여유롭게 웃는 타치카와를 노려보지만 더는 별수가 없었다. 버티지 못한 트리온체의 팔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무너지고 만다. 베일 아웃.




4. 타치카와, 시노다



죽음과, 그리고 그 죽음이 트리거에 얽혀 있을수록 깨닫는 것이 빨랐다. 트리거와 관련이 없는 죽음이라면 처음은 무리여도 도중에는 반드시 이 백일몽에서 깨어났으며,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시엔 모든 반복을 기억하며 백일몽과 함께했다. 간혹 그런 것 없이도 반복을 기억하는 예외 개체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수는 많지 않았고, 타치카와 케이는 위의 일례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마더 트리거 앞에서 마주하게 된 시노다 마사후미 역시 예외에 해당하진 않는 사람이었다. 생각하면 당연하다. 구 보더, 그리고 현 보더의 시작을 함께한 그이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을 지켜보았겠나. 그러나 케이, 하고 부르는 이름에는 체념이 담겨 있지 않다. 예상한 자의 각오가 담겨 있을 따름이다.


생각하면 당연하다. 아라시야마 부대는 시노다 파를 대표하는 부대 중 하나이다. 아라시야마에게서 쉽게 믿기지 않는 전모를 소상히 들은 시노다는 그 스스로 단서를 찾아 움직였고, 이해하고, 눈치챘으며, 마지막으로 이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라시야마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본부장님 외에는 막을 자가 없습니다. 진은 제가 붙잡고 있을게요. 과연 아라시야마가 진을 붙잡는 데 성공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타치카와가 진의 부탁을 받아 마더 트리거 앞에서 이를 부수려는 자들을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시노다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하다. 앞서 케이, 하고 이름을 부른 그가 트리거를 움켜쥐니 육신이 트리온체로 전환된다. 늘 언제나 깔끔하게 입고 다니던 양복 정장에서 코트 자락이 길게 내려앉는 전투체로, 다시 말해 전투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제자를 보면서.


“비켜라.”

“시노다 씨.”


그의 목소리에도 체념은 담겨있지 않다. 그들 목소리엔 담겨 있지 않은 모든 감정은 어디에 있나. 마치 공기 중을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 같다. 그러다 허파에 달라붙을 것만 같은 감정들이다. 먼지 같은 감정들. 목적과 비교한다면 어디까지나 그럴 감정으로.


“난 그동안 즐거웠어.”


사람을 무너뜨릴 계책을 짠다. 호월을 쥔 시노다의 손이 순간 움찔한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떨림이다. 사람인 이상, 살아있는 사람인 이상. 지켜본 사람인 이상…….


“처음엔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정말이야. 즐거웠어. 내가 언제 또 카자마 형님이랑 랭크전을 해보겠어? 근데 시노다 씨는 한 번을 안 해주더라고, 대련을. 이유가 있어?”


있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거부감이 크게 들어서 그랬다. 표현할 순 없었지만 울컥 솟구치는 거부감에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어서 들어줄 수 없었다. 이유를 묻는 질문은 아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떨렸던 만큼 더 힘을 주어 호월을 잡는다.


“케이.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모든 일이 벌어질 당시 시노다 루카가 타마코마 지부를 방문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럴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인질이라도 잡았다면 시노다가 타치카와를 제압하는 일의 난이도가 크게 상승할 뻔도 했다. 각오했으면 더는 흔들릴 이유가 없지. 시노다는 이내 자세를 잡는다. 타치카와를 응시하며.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말끝을 흐린다. 말하고 싶지 않은 끝을 문대어 흐려지도록 한다. 호월을 뽑아 든 타치카와가 호월 끝을 까딱이는데 안 되지, 그럼 안 되지, 라고 시노다를 타박하는 듯하다. 이토록 버릇없는 제자이지만, 이렇듯 버릇을 들인 것도 결국 자신이었다. 시노다 씨. 타치카와가 입을 연다. 말은 끝까지 해야지.


“아마 미와 그 녀석이었으면 이렇게 말했을걸?”


지금이라면 살아 있는 누나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라 입에 담을 일 없는 말일 것이다. 시노다를 따라 자세를 잡으며 타치카와가 유쾌하게 말을 잇는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그리곤 힘차게, 바닥을 내디디며 도약한다. 피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직격당했을 위치에 호월을 내리꽂는다.


“실력 행사하겠다.”


쇄도하는 이검의 칼날들. 시노다가 가르친 검, 그리고 날들이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상관없는 것이지.

승부를 결정하는 건 전력, 전술, 그리고 운.

기합으로 어떻게든 되는 건 실력이 상당히 엇비슷할 때뿐.



그들의 실력이 비슷한가? 말할 수 없다.


다만 운을 꺾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었다. 틈을 벌리기 위해. 빈틈을 발견하기 위해. 시노다 씨. 알려 줘.


“나 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어?”


너는 어떻게 내게 그런 질문을 하냐고 혼내야 했다. 그러므로 검을 멈출 순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바람 속에서 바람이 번지고 번지다 번져서 나온 무언가일 뿐이다. 진정 생이라면 열의를 가지고 불태웠겠지만, 이건 결국 쳇바퀴를 타고 빙빙 도는 신세로 전락시켰을 뿐이니 가히 모독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주워 끌어모아야만 하는 것이다.


즐거웠니, 하고 답이 질문보다 앞섰던 질문을 뒤늦게 던진다. 그래도 친절하게 응, 이라고 다시 한번 대답하면 공기 중을 부유했던 감정이, 거대한 감정을 갈아낸 끝에 먼지처럼 떠다닐지라도 본질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감정이, 슬픔이 어느 날의 거부감처럼 솟구쳐 범람한다. 얼굴을 가린 자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이다.


“다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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