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cousin, my cousin
- gwachaeso
- 3월 28일
- 5분 분량
<WT>
리퀘스트
TV에서 그의 사촌이 말한다.
「가족들이 무사하다면 아무런 걱정도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코나미, 뭐 봐?”
“기자회견.”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하는 코나미 키리에의 시선이 정확히 화면 속 그의 사촌에게로 꽂힌다.
“아…….”
코나미 키리에는 아라시야마 쥰이…….
어릴 적의 일이다. 얼마큼 어릴 적의 일이냐면 그가 이제 막 중학교 교복을 걸쳤을 만큼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이다. 코나미 키리에에게는 해 질 녘 강 옆의 산책로를 걸으면 볼 수 있는 반짝이는 윤슬이 좋아 돌아가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부러 돌아 돌아 그곳으로 하교하던 때가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그곳의 벤치에 앉아 윤슬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어린 코나미 키리에에게는 그런 날이 제법 많았다.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해 봤자 믿어주지 않는 것들이 가슴을 꽉 채우다 못해 입 속까지 들어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날들이면 붉어진 강물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꽉 메운 생각들을 함께 흘려보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어린 날의 코나미에게는 그런 날이 있었다. 지금이야 보더가 모두에게 번듯한 기관으로 자리 잡아 있고, 모두가 네이버를 알고 있지만 과거엔 그러지 못했던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감춰진 비밀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고, 의기양양해질 때도 많았다. 평소에는 거의 그랬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날이 온다. 친구의 가족이 실종된 날이라던가. 감쪽같이 사라진 친구의 가족에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친구 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위로해야 할 때라던가. 어른들과 함께 몰래, 경찰의 눈을 피해 수색한 자리에서 게이트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라던가. 몇 번이고 다른 세계로 건너갔던 그들이지만 아직까진 한 번도 실종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라던가…….
“키리에.”
그러한 생각에 잠겨 있던 코나미 키리에를 붙잡고 꺼내는 손길, 다시 말해 부름이 있어 코나미 키리에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사촌이 보였다. 잔디를 밟고 내려오면 빠르게 제 곁으로 올 수 있었을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잔디를 밟기보다 조금 멀리 돌아갈지라도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그의 사촌. 아라시야마 쥰.
그를 보았지만 코나미 키리에는 손조차 흔들지 않고 그저 계속 그를 보았다. 아라시야마 쥰에게 건넬 인사는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라시야마 쥰도 그 점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코나미 키리에가 일상적으로 저지를 사소한 결례 같은 것을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도 대수롭지 않게, 시원시원하게 넘기는 편이었다. 두 살이나 더 많은 연장자로서 두 살이나 더 어린 코나미 키리에의 투정이나 심술은 가벼운 것일까? 물어본 적은 없었다. 딱히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도 아니라서. 그래도 코나미 키리에는 그런 아라시야마 쥰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싫어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아라시야마 쥰은 싫어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하고, 다정하고, 올곧았다. 감히 질투할 수 없을 정도로. 시샘할 수 없을 정도로. 감히 그러자면 도리어 들여다보는 자신을 창피하게 만드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 소년임에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소년이라.
벤치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벤치였지만 코나미 키리에가 제 옆에 책가방이니 학교에서 가져온 바구니니 하는 것들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나미 키리에 곁으로 다가온 아라시야마 쥰은 코나미 키리에에게 그것을 치워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치울 틈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잽싸게 벤치 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바짓자락에 풀물이 드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릎은 세워서, 고개를 들어 코나미 키리에를 바라보았다. 코나미 키리에가 먼저 말을 하길 기다려주는 것처럼. 제가 먼저 말을 꺼내 코나미 키리에를 방해하진 않겠다는 것처럼. 그럼 한숨과 함께 입을 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나미 키리에도. 만약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길 원했다면, 그래서 더욱 가라앉고만 있었다면 먼저 말을 걸어 그곳에서 꺼낼 아라시야마 쥰을 알고 있었으므로.
“저녁 약속 안 잊었어.”
“다행이다. 어머니가 기대하고 계시거든. 오랜만에 얼굴 볼 생각에 기쁘신가 봐.”
“응…….”
코나미 키리에는 자신의 거취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 준 아라시야마 부부에게 꽤 감사하고 있었다. 코나미 키리에가 원하기만 한다면 즉시 방을 내어주고 그들의 가족으로 맞이해 줄 그들은 아라시야마 쥰을 길러낸 이들다운 선함과 다정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도 코나미 키리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그들의 가족이었고, 아라시야마 쥰의 가족이었다. 그 덕에 아라시야마 쥰은 코나미 키리에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질문은 아니지만.
“많이 힘들어?”
코나미 키리에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보더에서 지내고 보더에 소속되어 있는 한, 그리고 그가 아직 미성년자인 이상 가족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어른들의 결정은 그보다 더 단호했다. 그들은 코나미 키리에에게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함께 아라시야마 가로 찾아가야 했다. 아라시야마 부부는 아이들을 방 안으로 들여보내고 어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돌볼 것을 큰아들에게 지시했지만,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에게도 모든 것을 비밀로 할 순 없었다. 그래봤자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아라시야마 쥰이지만, 자신이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일 속에서 코나미 키리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걱정이 들 정도로. 그리고 아라시야마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다. 걱정이 든다면 걱정해야 했다. 괜찮냐고 물어야 했다. 아닌 척해도 물어봐 주길 원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조금.”
그래서 코나미 키리에도 조금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런 작은 감정 정도는 제 사촌에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것을 함부로 내버리지 않는 사람인 그는 그것을 잘 간직했다가 잘 닦아내서 다시 건네주곤 했다. 이런 말과 함께.
“걱정 마.”
“뭐를.”
“우린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러니 키리에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는 언젠가 조카를 걱정한 아리시야마 부부가 그를 말리려 할 때가 와도 제 사촌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말한 적 있었다. 그 말이 입에 발린 말이거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코나미 키리에도 알았다. 아라시야마 쥰은 대신 딱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을 뿐이었다. 코나미 키리에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라 그도 거기에는 대거리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지. 대신 무사해야 해. 그럼 나도 아무 걱정 없으니까.”
오늘도 이어지는 그 말에 코나미 키리에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걱정 마. 쥰. 내가 거기서 제일 강하니까.”
“다행이다. 키리에가 제일 강해서.”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그 말을 정말 사실로 믿고 환히 웃는 사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슬슬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 그는 코나미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여야 자리에서 일어나, 코나미 키리에가 제 물건을 만져도 괜찮다는 허락을 한 뒤에서야 그의 가방과 바구니를 들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자는 말은 그래도 아라시야마 쥰이 먼저 꺼냈다. 윤슬과 함께 걷는 길은 언제든 나쁘지 않았다. 사촌과 함께 걷는 길 또한.
사촌과 함께 걷는 길 또한…….
그로부터 몇 달 후, 이마와 뺨에 반창고를 붙인 아라시야마 쥰이 처음으로, 트리온 전투체로 전환한 코나미 키리에를 보게 된 날, 잘린 그 애의 오른팔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트리온 연기를 보게 된 날, 사방에서 비명과 비통에 잠긴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모든 광경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하는 코나미 키리에를 보게 된 날, 아라시야마 쥰은 코나미 키리에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키리에’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래야지 코나미 키리에도 그를 ‘쥰’이라고 부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몇 달 후, 보더 라운지에서 아라시야마 쥰을 마주한 코나미 키리에는 손을 드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버린다. 코나미 키리에도 자신의 마음이 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라시야마 쥰에게 인사하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하얀색 전투복을 입은 그에게는 아무래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TV에서 그의 사촌이 말한다.
「가족들이 무사하다면 아무런 걱정도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하는 코나미 키리에의 시선이 정확히 화면 속 그의 사촌에게로 꽂힌다. 코나미 키리에는 아라시야마 쥰이…….
“쥰!”
“키리에.”
라운지에서 몇 달 만에 코나미 키리에가 아라시야마 쥰을 불렀다. 아라시야마 쥰은 몇 달 만에 저를 부르고 아는 체하는 코나미 키리에에게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늘 그랬던 것 같이, 그간의 무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코나미 키리에를 환대했다. 물론 코나미 키리에의 요구는 그런 제 사촌보다 조금 더 무심하고 어쩌면 무례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코나미 키리에는 아라시야마 쥰에게 제 요구가 조금도 결례가 아니리란 것을 알았다. 실로 그랬다.
“나랑 랭크전 해.”
“좋아.”
웃으며 거절하지 않는 그를 보며 코나미 키리에의 눈썹이 조금 비뚤어진다. 하지만 괜찮다. 이 이상의 대화는 랭크전에서, 직접 부딪치며 하면 될 뿐이므로. 그것이 코나미 키리에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대화법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왔을 뿐이었다. 아라시야마 쥰하고도 그 대화법으로 대화를 나눌 날이. 그리고 그 사실을 아라시야마 쥰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욱 거절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또한 제 사촌과 진정으로 대화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 애를 기다리고, 배려해 주었지만, 보더에 들어가는 날이 올 때까지 코나미 키리에와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상의도 하지 않았던 그 역시.
“가자.”
“그래.”
대화가 필요하다.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대화의 끝에서 코나미 키리에는 한 가지 사실을 인정했다. 코나미 키리에는 아라시야마 쥰이 역시 좋다. 싫어할 수 있겠어? 이런 사촌을. 가족을. 쥰을. 그는 역시 코나미 키리에가 가장 좋아하는 사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