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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유서 A

  • gwachaeso
  • 3월 28일
  • 2분 분량

<WT>



저격수가…… 적에게 따라잡혔을 때 벌어질 결과란 뻔해서.



그를 A라고 부르기로 한다.

A는 그날 유서를 썼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몹시 사랑하고 아꼈던 A에게 죽음은 역으로 가까운 친구였다. 이 벗과의 거리가 퍽 가깝기는 해도 기꺼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죽음은 언제나 상정한바 안쪽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그가 유서를 쓴 까닭에는 스스로 지하의 문을 두드리는 인간과 같은 절망이 있었으며 이번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 체념. 우울. 침전이 있었고, 침잠하는 지식인이 바로 그였고, A였다. 물론 감정은 까닭에만 스밀 뿐 작성된 종이엔 무엇 하나 배어 나오는 것이 없었다.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제되었다. 온점엔 흔들림이 없고, 쉼표엔 삐뚜름하게 튄 획 하나 없었다. 그는 극도로 무감한 자처럼 문장을 쓰고 맺었다. 그의 유서는 지시문이었다. 명령문이었고, 선언문이었다. 청원은 없었다. 간청도. 간절한 마음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문장? 사치였다. 또한 낭비였다. 한정된 공간, 바란다면 얼마든지 페이지를 추가해도 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간추려서 정리한 서술들. 내가 돌아오지 않게 되거든 맨 위 서랍에 넣어둔 편지봉투를 확인하렴. 그러나 그 말을 전달받은 유일한 청자 H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걸 확인하면 당신이 정말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게 되니까. 결과를 보았을 때 H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안 그가 결국엔.


“돌아왔잖아요.”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그러니까 A 씨가 읽으세요, 편지는. 그 말에 오래전 자신이 썼던 편지를 받아 읽는 A였지만 H의 바람과 달리 A의 머릿속에 새로이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구멍 난 기억 사이로 바람은 스쳐 지나갈 뿐 머무는 일 없이 빠져나갔다. 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구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읽고는 편지를 접는다. 반으로.


“미안하구나.”


건네며, 반토막 나기라도 했으면 반토막이라도 무사했을 기억 속에서 함께 무사했을 소녀에게 사과한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으세요. 무얼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아무래도.


“유서를 잘 쓴 것 같아. 죽은 것과 다름없으니.”


그 말에 H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런 말 마세요. 미안. 그러며 작게 웃지만 세상을 보는 A의 눈은 여전히 흐릿하다. H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도 더욱 짙어지는 것 같이.



기억을 봉인하는 기술이 있는가 하면 정보를 빼내기 위해 엉망으로 헤집는 기술도 있는 터라, A가 돌아왔을 때 A의 기억은 진창에 마구잡이로 내던져진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A는 한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청년이었다. 많은 것을 배웠고, 연구했고, 탐구했으나 이제 와 그에게 남은 것은 빈 책장과 쏟아진 책들이렷다. 번호도, 순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일부는 찢기고 일부는 밟힌. 책들을 하나하나 주워 들지만 본래의 순서조차 빼앗긴 그에게 책장은 너무나 광활하고 하나하나의 기억은 얇은 책자와 같았다. 갈래로 갈라진 기억. 쪼개진 조각. 찢긴 시간. 부스러진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갈아버리길 원했다. 그래서 새로 돋아난다면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탕!


트리거는 압수당했다. 그는 자신이 날려버린 것이 트리온 육체의 머리에 불과하다고 항명할 수 없었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어요. 변명은 듣지 않을 걸세. 이제 얌전히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기나 해. 결국은 덕담이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휠체어를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어서, 모두가 경계했지만 정작 그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정말로 잠자코, 자신의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더랬다. 그래서 더더욱 경계의 대상이 되었지만. A씨. 생각나는 게 있으세요. 이따금 그에게 질문하는 소년들에게 그는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무얼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세요? 지금은…….


“너희가 누군지 알고 싶은 것 같네.”

“그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지만요.”


그날 저격수는 왜 적에게 따라잡혔을까?

그의 기억이 ‘정말’ 사라진 날은 언제였을까?



“미치기 딱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언제쯤 미치려나 했던 것도 사실이야.”

“네가 먼저 미칠 줄은 몰랐지만.”

“내가 말했지. 너도 어리다고. 나보다 모두가 어리다고…….”

“아니다. 그래. 어디까지 지워주길 원해?”


아무도 없는 밤에 휠체어를 움직인 A가 도착한 장소가 있다.

그를 A라고 부르기로 한 건 자신이다. 유서를 쓴 A. 유서를 읽은 A. 유서는…….

잘 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A가 말했다.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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