嗚呼痛哉
- gwachaeso
- 3월 28일
- 3분 분량
<WT>
동양풍 AU 타치렌
졌다.
그리고 유배되었다.
그럼에도 목숨은 부지하였으니 제법 수지타산이 맞는 치세였겠다. 짧은 치세였고 정무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난군이었지만, 제 목숨 하나 부지하는가 그 여부가 결정되던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저 자신의 이해를 따져 헤아린 적이 없던 왕이었다. 타치카와 케이는. 그것이 성군의 자질 중 하나였는가 하면 이제 와 알 수 없고 알 길도 없지만, 이제는 익선관이 올라가 있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고 하품을 하며 바닷가로 나아가는 그에겐 이제야말로 할 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와 세필을 잡고 옛 성현들의 문장을 한 자 한 자 베껴 적을쏘냐. 세자 시절에도 하지 않은 일을 자진해서 할 이유가 없고, 세자가 되기 전, 대군들과 군들 사이 많은 왕자 중 한 명이던 시절에도 서책을 붙잡고 앉아 있는 시간만큼 고되기 그지없던 시간도 없었다. 공자 왈, 맹자 왈.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나가는 성현의 말씀에 대신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벗에게는 지금도 제법 미안하다. 그런 그에게 무예의 재능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스로 틔워내는 것까지도 그의 역량에 달려 있었으니 타치카와 케이가 한 것은 그다지 없었다. 마땅한 자에게 마땅한 자리를 주었을 뿐. 범사에 그리 행동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하여, 또는 그러지 아니하여 난군으로 폐위된 그는 모랫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지가 더러워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그에 살림을 대신 보아주는 이들은 불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나라님은 무너져도 나라님이라고 대놓고 대거리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글쎄. 언제까지 나라님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었다. 새 나라님, 니노미야 마사타카가 제게 사약을 내릴지 말지 가늠하는 것도. 글쎄, 어떻게 생각해? 그러고는 먼저 이곳에 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아즈마 씨.”
“글쎄다.”
이곳에 와 바다낚시에 취미를 들였는지 그는 언제나 바닷가에 나와 있었다. 모른다, 타치카와 케이가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마을 아이들에게 천자문이라도 가르치고 있었을지. 대학에서 수학할 적 타치카와 케이는 당시 대제학이었던 그의 강의를 들은 바 있었고, 예상했듯이 기억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앞자리에 앉은 니노미야 마사타카가 강의 내내 허리를 빳빳이 세워 앉으며 쉼 없이 필기하던 기억 정도나 남았을까. 반정을 성공한 그는 과연 성군이 될지. 이 역시 두고 볼 일이었다. 역당의 씨는 모조리 걷어내고 줄기는 뿌리째 뽑아내는 것이 장차 새 주상의 치세 안정에 도움 될 결단일 테지만, 타치카와 케이로서는 아무렴, 사약이 내려오는 날은 늦어질수록 좋았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으니까. 아직은? 그는 언제나 죽고 싶지 아니했다. 그래서 왕이 되었나? 그랬던가?
그래서 왕이 되진 않았다. 겨우 제 한 목숨 염려해서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의 목숨을 지고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 어릴 적, 하늘은 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은 희고, 흰 종이와 검은 글자보단 그것이 더 마음에 내려앉던 그날에, 놓치고 만 어느 여자아이의 손을 잡으려다 이리되었는지, 그 손에 떠밀려서 이리되었는지, 그런 건 전혀 상관없이 자라다 그저 기회가 보여 기회를 잡았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타치카와 케이마저 알지 못하니 아무도 알지 못하리다. 그러니 아즈마 하루아키가 할 수 있는 말도 하나뿐이다. ‘글쎄다.’ 난 모르겠다. ‘왜 몰라? 당신이.’ 돌아간 북쪽 땅에는 이미 그 아이가 없었다. 그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었잖아? 당신이 데려가 제자로 삼았지. 그래서, 아쉬웠니? 화가 났니? 아니.
아니……. 화가 난 적은 없었다. 그래도, 화가 났어야 했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이즈미 코헤이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을 적에, 무려 왕자의 제안을 선약을 구실로 거절했음에도 유쾌해 보인다고 말을 올릴 적에, 타치카와 케이는 유쾌하게 웃는 대신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어야 옳았을까? 이제 와 알 방법, 알 길, 알 도리가 있긴 할까? 아즈마 씨, 가르침을 청하면 알려줄 수 있어? 이제 와 예를 올리기엔 한참 늦었지만서도.
“아니.”
“야박하네.”
“타치카와.”
“왜, 아즈마 씨.”
그런 말은 사사하기 전에 했어야지.
너무 늦었잖아.
…….
“아.”
철썩이며 부딪치는 파도 소리 혼자 요란하다. 타치카와 케이는 혼자 바닷가에 서 있었다. 낚싯대처럼 기울어진 나뭇가지 하나 백사장에 꽂혀있을 뿐. 왜 그랬을까? ‘아이들한테 당신까지 빼앗는 건 너무하잖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안 그래 보여도, 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도 실은 화가 났던 걸까? 알 방법, 알 길, 알 도리가 이젠 없다. 타치카와 케이는 이곳을 떠날 수 없고, 츠키미 렌은 이곳까지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래. 청하기엔 너무 늦었고, 예를 올리기엔 한참 늦었다. 손을 잡았어야지, 그때.
손을 잡았어야 했어. 그때.
생각하는데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있었다. 흰 모래를 밟고 사박사박 다가오는 소리가 있어 고개를 돌렸더니, 한 무리의 이들이 숲이 끝나고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경계에 서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머리가 가장 검고, 긴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니, 타치카와 케이는 그들이 뭍에서 무엇을 가져왔는지 직감한다. 그리곤 아, 오늘이로구나. 하는 것이다. 오늘에야. 한 번 나라님은 무너져도 나라님. 그러니 이 땅에 나라님을 둘이나 둘쏘냐. 그건 안 되지. 안 된다고 생각했으리다. 아니면 신하들의 상소를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유감이야. 유감이렷다.
그렇지만 안녕. 하고 인사할 수는 있었다.
“안녕, 츠키미.”
어린 시절처럼 인사할 순 있었다.
“안녕, 렌.”
흰 건 너의 얼굴, 검은 건 너의 머리칼이겠다.
“안녕.”
남은 건 인사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