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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스케치

  • gwachaeso
  • 3월 28일
  • 3분 분량

<WT>

리퀘스트



귀족 가문의 가신에게는 귀족만큼은 아니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철자가 몇 가지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평민 치고 내재한 트리온 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끌려가 트리온 혼 시술을 받은 어린아이가 글을 배우게 된 유일한 이유였다. 보통은 책 하나 던져 주고 알아서 익히라 주문받는 게 전부였을 처지였으나, 그를 저택으로 데려간 이는 제법 인정이 있고 인망이 두텁기로 유명한 귀족이었다. 아이에게 정식으로 교사가 붙어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하니 학습하는 속도가 과연 빨랐다. 철자 책을 보지 않더라도 제 이름을 외워 쓰기까지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휴스. 글은 배울 만하니?’ 주군의 다정한 말에(아이는 이제 ‘주군’을 어떻게 적는지도 알게 되었다) ‘네. 재밌습니다.’ 하고 대답한 아이에겐 곧 다른 교사가 붙었다. 검을 잡는 법을 가르치는 자도, 붓을 잡는 법을 가르치는 자도. 귀족 가문의 가신에게는 귀족만큼은 아니어도 일정치 이상의 교양이 요구된다. 하지만 아이를 기르는 가족 또한 아이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어 할 수 있다. 세상을 배워가기를,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를 바라면서.


“휴스. 그림 잘 그리네?”


라이진마루를 그려달라고 조르는 린도 요타로에게서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건네받아 형태를 잡아나가는 와중이었다. 소파 뒤로 지나가던 코나미 키리에가 의외라는 듯이 말하며 발을 멈춰 서자, 그 말을 듣고 방에서 나오던 카라스마 쿄스케도, 랭크전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자료를 들고 오던 미쿠모 오사무도, 쿠가 유마와 자전거를 타고 온 아마토리 치카도 휴스 주변으로 모여든다.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오늘의 식사 당번 키자키 레이지도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뻗는다. 이미 소파 주변으로 모인 인파로 인해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순식간에 모여든 구경꾼들로 부담스러워할 법도 하지만 휴스의 손은 여전히 거침없이 뻗어나가고 색을 바꿔 들며 (아마도 린도 요타로의 부탁으로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라이진마루의 ‘초상화’를 색칠하기 시작한다. ‘우와…….’ 여기저기서 감탄이 나오기 시작하자 휴스의 입꼬리도 아주 미미하게 올라간다. 이윽고 그가 크레용을 내려놓자 스케치북에는 크레용으로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라이진마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끝났다.”

“우와아아아아!”


하지만 린도 요타로의 함성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스케치북을 받아 든 그는 곧장 라이진마루에게 다가가 그에게 그를 그린 첫 초상화를 보여준다. 사실, 그전까지 린도 요타로가 그린 라이진마루도 제법 많았으나 린도 요타로는 휴스가 그린 이것이야말로 ‘초상화’―그러니까, 어려운 한자로 이뤄진 어른스러운 단어 말이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라이진마루도 휴스가 그린 초상화가 좋대.’ ‘그럴 수밖에.’ 다른 일, 다른 때였다면 잘난 척하지 말라고 머리 위로 손날을 내리쳤을 코나미 키리에도 이번만큼은 실제로 잘난 그를 인정하기에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사이 ‘그림을 따로 배운 적 있는 거야?’ 감탄 섞인 미쿠모 오사무의 질문에 휴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곧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한다.


“본국에 있을 때 배웠다.”

“그렇구나…….”


그림을 배우지 않은 미쿠모 오사무로서는 배우기만 하면 휴스처럼 잘 그릴 수 있게 되는지, 아니면 휴스에게 천부적인 미술적 재능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분명히 사실인 건 휴스의 그림이 굉장하다는 것이고 미쿠모 오사무는 진심으로 말한다. ‘굉장하다.’ 아마토리 치카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끊이지 않는 찬사에, 열화와 같은 성원에 ‘별거 아니다’ 식으로 겸손하게 구는 일 따위 없는 휴스지만, 그래도 나름 기꺼이 또 다른 요청을 받아주기로 한다. ‘나, 나! 나 그려 줘!’ 린도 요타로에게서 다시 건네받은 스케치북을 다음 장으로 넘긴 휴스가 신이 나서 맞은편에 앉는 코나미 키리에를 보며 연필을 집어 든다. 한껏 들떠서 앉아 있는 코나미 뒤로 우사미 시오리와 함께 린도 타쿠미의 심부름을 나갔던 진 유이치가 돌아와 여전히 휴스 뒤로, 옆으로, 소파 주변에 한데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다녀왔어. 코나미 차례로 넘어갔구나?”

“휴스, 그림 그려!?”

“수고했어, 진.”

“진! 휴스, 그림을 엄청 잘 그려!”

“휴스가 요타로에게 라이진마루를 그려줘서 신났어.”

“진도 꼭 봐야 해! 직접 봐야 해!”

“그래, 그래.”


이따가 코나미 키리에를 다 그리게 되면 휴스에게서 스케치북을 돌려받아 라이진마루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린도 요타로의 팔을 잡고 높이 높이 들어 올리며 놀아준 진 유이치의 시선이 완전히 타마코마 지부에 녹아든 휴스를 향한다. 스케치북과 코나미 키리에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림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 휴스에게. 그리곤 까르르 웃는 린도 요타로의 웃음소리에 묻힐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씩 웃는다.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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