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비자림

사랑담

  • gwachaeso
  • 4월 7일
  • 4분 분량

<HQ!!>

오이이와

사랑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첫눈에 반하여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짧은 대화에서도 친절한 그의 모습과 다정한 성격을 알 수 있어 마음을 정했습니다. 눈여겨 본 신발장에 시간과 장소가 적힌 편지를 넣었고, 빈 교실에 남아준 그이에게 다가가 고백했습니다.’ 사실 그이라고 부른 시점에서 시청자들에겐 이야기의 결말이 공개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년이 된 여성의 눈이 수십 년 전 소녀 시절의 풋풋한 사랑을 추억하며 지그시 감길 때, 도리어 깜박이지도 못하고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이쪽이 되었으니, ‘그이는 내 고백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해요. 사실 당신에 대해 잘 모른 채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나는. 예상했던 거절이기에 슬펐지만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전까지 두려웠던 마음이 사라져 편해지기까지 했는데, 그 순간.’ 시청자 대신 말을 잇던 사연의 주인공이 잠시 말을 멈추다가 가장자리가 주름진 눈을 빙긋이 접으며 웃는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러니 우리 친구부터 시작할까요?’ 그 뒤 스튜디오에 퍼져나가는 패널들이 터뜨리는 감탄과 탄성. ‘그건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기에 속절없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때가 가장 두려웠어요.’ ‘고백의 순간, 나는 이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런 주제로 시작된 토크 쇼에서 마지막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열띤 호응 속에 마무리되는 가운데, 나에겐 문득 그런 궁금증이 생겼다. 참을 이유가 없기에 내 옆에 앉은 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는. 아니지. ‘너도.’


“무서웠냐? 나한테 고백했을 때.”

“응.”


곧장 돌아온 대답에 하마터면 말문이 막힐 뻔했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여전히 TV에서 눈을 떼지 않는 너는 부러 나를 보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다. 뭐가 제일 무서웠는데? 아니지. 그건 뻔하지. ‘거절당할까 봐?’


“응. 이와쨩이 내 상상 속 이와쨩처럼 대답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 오호라. 웬일로 순순히 대답하는 너는 화면이 광고 방송으로 바뀐 뒤로도 나를 보지 않았다. 여전히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부러 나를 보지 않는 네게 나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네 상상 속 나는 뭐라고 했길래 무서웠는지 어디 한번 들어보자.”


그러자 열 없는 목소리로 네가 대답하기를,


“친구로 끝내자.”


말을 잇기를,


“그렇게 말할까 봐 무서웠어.”


‘너도.’ 대답하는 너의 눈엔 오로지 TV만이 담긴다.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라는 건 서로를 모르는 날이 하루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의 일이지만, 첫 아이를 이웃집 늦둥이가 될 아이보다 사십 일 일찍 낳으신 어머니께선 눈을 떴다 말았다 하는 아기를 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가셨다고 했다. ‘하지메도 건강하게 태어났으니까, 토오루도 그럴 거예요.’ 그 시절 당신께서 하셨다는 말씀이다. ‘우리 아이들은 친구가 될 거예요.’ 그렇게 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내게 투시 능력 같은 초능력은 없었으므로 태어나지 않은 친구를 직접 보게 된 건 내가 태어나고 사십 일이 지나 ‘태어나지 않은 친구’가 태어난 이후였다. 아무튼 그럴 것이다. 나는 너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 역시 마찬가지이리다.


그렇게 처음부터 친구로 시작했기에 친구부터 시작하지 못하는 우리가, 친구 이상의 지금 같은 관계가 되기까지의 역사는 제법 지난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친구조차 되지 못하게 될까 봐 끙끙 앓았던 열병 같은 사랑은 그 시기조차 서로 달랐기에 더욱 곤혹스러웠다. 그러니 네가 가졌던 두려움을 네 입으로 듣게 되는 날도 이리 늦게 맞이하게 되는 걸 테다. 손을 뻗으면 그 손이 네게 닿지도 않았는데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너였다. 그렇게 뻗은 손이 뺨에 닿으면 그 뒤 일어날 일을 일어나기 전부터 알아 눈을 감는 너였고, 지근거리에서 숨이 오간 뒤에는,


“그치만 진짜로 무서워하진 않았겠지.”


귓가 가까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닿는 숨이 간지러운 건지 웃음소리가 간지러운 건지 알지 못한 채로 고개를 틀었더니 더욱 바짝 다가붙어 오는 통에 열이 옮아 뜨끈해졌다. 이보다 더욱 뜨거워질 수 있을까? 막연히 그런 의문을 품는 가운데 내가 맞춘 정답을 부인하지 않은 네가 대신 해설을 붙였다. 거드름 피우는 목소리가 밉지 않으니 너로 인해 이토록 글러 먹고 만 나였고, 결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 다짐하는 사이 무게에 눌려 몸이 뒤로 밀린다.


“그야 이와쨩이 날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어. 너란 녀석은.”

“기대에 부응해 줘서 그래. 네가 항상.”


예상한 사랑에 놀라지는 않을지라도 기뻐하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으니 너는 내 대답에 한없이 기뻐했으며, 예상치 못한 사랑에 외려 놀란 나는 내가 그것에 놀란 게 아니란 걸 알 때까지 제법 긴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거슬러 올라간 수십 년 전과 달리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쪽의 어둠에 겁에 질리는 일 따위 겪지 않지만, 그럼에도 검정에 섞여 깜박이는 빛깔이 신경에 거슬릴 순 있었다. 시선은 한 곳에 고정하니 어디까지나 시야 밖에 위치하겠지만 거치적거리는 건 아무래도 치워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네 목에 팔을 걸어 끌어당긴 뒤에 분명하게 말했다. ‘TV는 네가 꺼라.’ 그 말에 다시 웃은 너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불은 안 꺼도 돼?”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첫눈에 반하기엔 처음 본 날에 어떠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평생 나눈 대화 중에 그래도 고백만큼 마음을 조이며 꺼낸 말은 아무래도 없었습니다. 보아온 모습과 성격이 있어도 마음을 아는 건 어려웠고, 눈여겨 본 순간에 담긴 게 사랑이었음을 자백하는 날은 여생 중에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결말이 공개된 이야기였다. 이제는 유습한 사랑이었다. ‘내 고백을 듣고 이렇게 대답한 게 여태 기억나. ‘진심이냐?’ 그 뒤엔 이렇게 말했잖아.’ ‘장난치는 거면 너 진짜 죽는다.’ ‘맞아. 사실 그때 바로 알았어. 네가 뭐라고 대답할지를.’


잠시 말을 멈춘 너는 다시 말을 잇기까지의 빈자리를 웃음으로 채웠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네가 웃는 모습을 눈꺼풀 안쪽에 그려냈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게 가능할 만큼 내가 너를 오래 보아 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너를 오래 보아 와서. 사랑해서.


서로를 모르는 날이 하루도 존재하지 않았을 적, 나는 기억할 수 없는 시절에 정해진 사랑이다. ‘나도 너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예상치 못한 사랑에 되레 놀란 까닭은 예상치 못한 게 아니었음을 그 순간에 와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알까? 나는 내 사랑이 두려웠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네게 독심술 같은 초능력은 없으니 네가 그걸 아는 날은 내 입으로 그걸 직접 들려주는 날과 같을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럴 것이다.


친구로 끝낼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동안 너는 고백을 이어나갔다. 고백 뒤에 이어진 고백은 지난날에 관한 것이라 지금에 와선 예상할 게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서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너를 속절없이 사랑할 뿐이었다. 나는 그때가 가장……. 그럼에도 고백의 순간을 마디마디 나누어 되짚는 대화의 마지막 이야기는 졸음에 겨운 탓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열띤 숨도 차츰 가라앉아 수면 아래로 잠기는 가운데 나는 네 목소리 역시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이유가 없기에 나는 내 옆에 누운 너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내 네 뺨이 내 손에 닿으면 내가 말했다. 자자. 응. 너도.


“잘자.”


그런 이야기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