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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Ηώς

  • gwachaeso
  • 3월 28일
  • 4분 분량

<WT>

리퀘스트



쿠마가이 유코는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보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에 우주를 다루는 어린이 과학책을 읽은 적이 있다. 행성과 항성, 은하, 그리고 별자리를 다루는 책들. 아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으레 그렇듯 별자리였고 한 페이지를 까맣게 가득 채운 우주에는 점점이 박힌 별 중 유독 밝게 빛나는 별들을 연결한 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 선조차 별자리의 일부, 그러니까 별들인 줄 알았다. 아니면 어떻게 저렇게 점처럼 딱딱 찍혀 있는 별들로 큰곰자리, 오리온자리의 큰 곰과 오리온을 연상하겠는가. 하나 선은 긋는 자의 손끝에 있었고 점은 하늘 위에 있었다. 별은 하늘 위의 작은 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러한 별 중에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별 하나쯤은 있었다. 큰개자리를 보았을 때였다. 밤하늘에서, 태양이 모습을 감춘 하늘 전체에서 가장 밝은 별이 있었다. 겨울의 대삼각형을 만드는 별. 낭성(狼星)의 푸른 빛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쿠마!”


그 빛 속에서 나스 레이가 쿠마가이 유코를 불러 깨운다. 쿠마가이 유코는 자신이 잠시 기절했음을 깨닫는다. 왜? 팔을 들어 올려 옷소매를 확인하니 나스 부대의 하얀 전투복이 아닌 남색 니트 카디건의 올이 풀려 흔들리고 있다. 트리온 전투체가 박살 나 트리거에서 본래 신체가 사출된 것이다. 왜? 베일 아웃은 작동하지 않은 건가? 의문을 품기 충분한 상황이지만 동시에 적절하진 못했다. 쿠마가이 유코는 전장 한가운데에 어떠한 보호 장비 없이 맨몸으로 떨어진 사람과 같았다. 그것도 거대한 몸집으로 민첩하게 움직이며 파괴되는 도시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괴물이 있는 전장으로. 그런 그를 가로막고 선 자의 등을 쿠마가이 유코는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퍼뜩 상황을 깨달아 파득 하고 몸을 떤다. 나스 레이의 기본적인 전투법은 장애물을 방패로 삼아 기동전으로 사냥감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사격 트리거를 사용하는 그에겐 이렇게까지 적과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여 얻을 이득이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렇게 나선 이유는 하나뿐이다. 쿠마가이 유코가 이 자리에 있기에. 오직 그뿐. 쿠마가이 유코는 까득 어금니를 악물고 혀를 피가 나오기 직전까지 짓씹는다. 이 상황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뿐이다. 쿠마가이 유코가 나스 레이의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 그를 엄호하고 보조하는 것이 쿠마가이 유코의 주된 전법인 것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방해했다는 것.


“괜찮아?”


하지만 전장에서 우울함에 잠기는 것은 지극히 사치스러운 고민인 것을 쿠마가이 유코는 잘 알고 있다. 괜찮아, 레이. 그를 안심하기 위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다. 고마워, 날 구해줘서. 나스 레이는 나스 부대의 대장으로서 자신의 부대원인 쿠마가이 유코를 구하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인 사람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감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이에 나스 레이 또한 정 없이 이를 받아치는 대신 미소로 화답한다.


“응. 쿠마.”


그리고 다시 완전히 몸을 돌려 쿠마가이 유코에게 자신의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나스 레이, 쿠마가이 유코의 대장이다. 그리하여 쿠마가이 유코도 오직 나스 레이만을 보았던 자신의 시야를 그의 주변으로 한층 더 넓혀 확장한다. 그의 주변에는 무수한 수로 잘게 나뉜 작은 정육면체의 트리거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나스 레이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잘게 쪼개어 모든 조각을 통제하고 제어하진 않을 테지만, 그건 너무나 골치 아프고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나스 레이는 그걸 능히 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쿠마가이 유코는 알고 있다. 가능케 하는 사람인 것을.


하지만 오늘의 그의 기세는 좀 더 창광하다. 쿠마가이 유코는 자신의 부상이 그를 화나게 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스 레이는 오래전 B급 랭크전에서, 부대원들과 떨어져 혼자 남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쓰러뜨리겠다’라고 말하던 날과 비슷하지만 그날보다 더 날 세운 기세로 눈앞의 트리온 병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쿠마가이 유코는 그의 뒤에 앉아 있기에 그 시선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스 레이 또한 고개를 돌려 쿠마가이 유코에게 그것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스 레이의 ‘쿠마’라도 이는 두려워할지도 모르니까. 겁먹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건 사양하고 싶기에 그는 올곧게 제 앞에선 트리온 병사의 노란 눈을 응시할 뿐이다.


두려워하라.

경외하라.


쿠마가이 유코는 오래전 나스 레이가 그리는 바이퍼의 궤도에 별자리를 연상한 적이 있었다. 연약한 나스 레이의 본래 신체에는 버겁기 그지없는 공기로 가득 찬 세상, 그곳에서 나스 레이가 그리는 빛의 선은 나스 레이의 의도 아래, 그가 그려낸 궤도를 따라 목표물로 날아가 명중시켰다. 적중시켰다. 무너뜨렸다. 파괴했다. 쿠마가이 유코의 눈에 나스 레이가 쏘아 올린 트리거의 궤도는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그를 떠올리며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붙고 만족감이 느껴질 정도로. 미(美)란 그런 것이었다. 흔들림 없이 자유자재로 뻗어나가는 선. 거침없는 필치에 쿠마가이 유코는 매혹되었더랬다. 이미 오래전에. 그래, 오래전에 매혹된 쿠마가이 유코였다. 오늘이 아닌 날에, 이미.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쿠마가이 유코는 트리온 병사 앞에 선 나스 레이로부터, 자신을 보지 않는 나스 레이로부터 그의 적 된 자가 마주했을 감정을 일부나마 체험한다. 두려워하라. 경외하라. 선은 긋는 자의 손끝에 있고 점은 하늘 위에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을 나는 회개합니다. 밤하늘에는, 태양이 모습을 감추어 하늘 전체의 천구에 이르러 천체에서 가장 밝은 별이 있나니 쿠마가이 유코는 지금껏 그 별이 나스 레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가장 밝은 별, 겨울의 대삼각형을 구성하는 별, 푸른 빛의 낭성이.


아니. 그런 건 ‘레이’가 아니야. 쿠마가이 유코의 ‘레이’는 별이 아니야. 언젠간 타오르는 걸 멈추고 스러져 식어버리는 그런 별이 아니야. 나스 레이는, ‘쿠마’의 ‘레이’는.


별을 쏘아 올리는 자.


이윽고 모든 별이 나스 레이로부터 쏘아 올려져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은 그것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트리온 병사지만 이미 그 움직임을 예측한 듯 휘어지고 또 그대로 꿰뚫어 부수는 그 모든 별에서 도망치고 그 모든 별을 피하고 그 모든 별에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별의 궤적은 감히 그것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로 이러한 궤적은 보더에서도 이즈미 코헤이와 나스 레이 정도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절대로 도달하기 쉬운 경지가 아니었다. 나스 레이는 겨우 손끝으로 별이 지나갈 길을 그리는 자가 아니다. 별은 하늘에 있다. 이 순간 그 역시 하늘에 서 있다. 가볍게 도약하여 방패 없이 공중에 선 그의 양손이 하나로 모인다. 쿠마가이 유코는 나스 레이가 무엇을 할지 알아차려 입가에 미소를 띄워 올린다. 아아.


풀 어택.


이 별자리에 이름을 붙인다면 새장자리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라. 그럼 나스 레이는 그 별자리를 쏘아 올린 자이니, 그런 건 신이나 할 수 있는 행위이니, 곧 신이 된 자가 될 것이다. 쿠마가이 유코는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보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에 신화를 다루는 어린이 동화책도 읽은 바 있었다. 그리하여 쿠마가이 유코 앞에 다시 한번 가볍게 내려앉는 나스 레이를 바라보며 쿠마가이 유코는 세상에 빛을 가져오는 자를 연상한다. 밤의 장막을 걷고 아침을 여는, 스스로 쏘아 올린 빛도 손짓 한 번에 지워버리고 쿠마가이 유코를 향해 다가온다. 태양을 선도하고 전쟁을 사모하는 신이 여기 있다.


에오스(Ηώ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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