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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지갑

  • gwachaeso
  • 3월 21일
  • 5분 분량

<WT>

日님께 선물로 드린 글



지갑이 없어졌다.



어? 생각보다 소리가 먼저, 다소 얼빠진 소리가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뒷주머니가 빈 걸 알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진 앞주머니였지만 앞서 예상한 바와 현실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즉, 아무것도 없었다. 허상의 지갑 또는 동전을 찾아 헤매던 손이 주머니 속에서 허우적대길 멈췄을 때 아즈마는 자판기 앞에 서 있었고, 필요한 몇 푼의 동전을 쥐지 못한 채 빠져나온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영수증 하나라도 잡힐 만하건만 그것조차 없다니. 어딘가에 놓고 나온 모양이었다. 지갑을. 작전실, 아니면 학교에. 집은 아닐 테지만, 뭐가 되었든 지금은 아쉽게만 되었다. 카드 결제는 휴대전화로도 할 수 있지만 카드를 받지 않는 이런 자판기는 답이 없었다. 마른 목을 축이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하겠다. 작전실로 발을 돌리며 아즈마는 가능한 한 그곳에서 지갑을 찾길 바랐다.


그러나 작전실에서도 지갑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높은 확률로 지갑은 학교에 있을 터였다. 야간 방위 임무를 끝마치면 학교에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글렛을 손에 쥐었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아직은. 누가 훔쳐 가진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절도보다 기억의 누락을 의심하는 편이고, 그것이 보통의 반응이었다. 잃어버린 건 찾으면 되었다. 잊어버린 건 기억해 내면 되었다. 설사 기억해 내지 못하더라도 찾기만 하면 흐지부지 무마할 수 있는 정도의 누락이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아즈마는 자신의 잃어버린 지갑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갑만 잃어버린 것일까?


깜박, 하고 눈을 감았다 뜬 건지 조명이 잠시 꺼졌다 켜진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사실은 ‘의식’이 끊겼다 이어진 것이라는 걸 잠시 후엔 알았다. 베일 아웃용 침상에서였다. 아즈마는 베일 아웃용 침상에서 눈을 떴다. 방위 임무 도중에. 근접 공격수보다 높은 생존율을 가지는 스나이퍼 중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아즈마 하루아키가 랭킹전이 아닌 실제 방위 임무 수행 중에 베일 아웃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본인도 다소 당황해하며, 또는 황당해하며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오퍼레이터와 함께 남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하기에 침상에서는 곧장 일어났지만, 아직 채, 일어나지 않고 남은 자신이 침상에 남아있는 것 같다는 잔여감이 남았다. 그러나 오래 생각지 않고 발을 옮겼다. 아즈마 씨!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아즈마가 나올 때까지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린 히토미에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함께 상황을 보자. 다들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물으면서, 자꾸 다른 방향으로 새어 나가려고 하는 정신을 집중했다. 풀어놓는다면 달려갈 의식이 도달할 질문은 이와 같았다.


잃어버린 게 과연 지갑일까?


왜 갑자기 지갑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고 아즈마는 생각했다.




기억이 없어졌다.



위와 같은 결론을 내기 전이었다. 무사히 트리온 병사를 격파하고 본부로 돌아온 코아라이가 우는 소리를 내었다. 아즈마 씨,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뒤따라 작전실로 돌아온 오쿠데라는 그런 코아라이에게 애처럼 굴지 말라며 핀잔을 놓았지만 놀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평소보다도 더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하하 웃는데, 그런데 너희, 내가 어쩌다 베일 아웃 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니? 그리 질문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멀리서 갈고리 같은 것을 뻗는 것을 보았어요. 순식간이었어요. 저희가 포착했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아즈마가 ‘복기’를 과제로 내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곧장 아즈마 씨에게로 팔을 뻗은 걸 보면 저격수의 위치가 발각된 것 같은데. 그리고 먼저 제거해야겠다고 판단한 거겠지, 저격수를. 네이버에게 그 정도의 지능이 있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누락된 기억을 보충하는데, 히토미만이 진의를 눈치채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아즈마에게 말을 걸었다. 아즈마 씨, 혹시……? 그에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아즈마다. 아니, 아무 일도 아니란다. 괜찮아. 문제없어.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웃으니 속아 넘어가 ‘주는 수밖에’ 없는 히토미다. 어쩌겠는가. 그가 괜찮다는데. 그로선 하는 수 없고, 간섭할 재간도 없다.


“괜찮아.”


거짓말!


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당연했다. 기억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코아라이와 오쿠데라가 세밀하게 풀어 쓰고 히토미가 옆에서 오퍼레이터의 시각에서 관찰한 사실을 보충하는 그 모든 상황이 아즈마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즈마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야간 방위 임무를 끝마치면 학교에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이글렛을 손에 쥐었을 때에 멈춰 있었다.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던 때에. 누가 훔쳐 가진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때에. 그야, 보통은 절도보다 기억의 누락을 의심하는 것이 정답이니까. 그리고 그 뒤에 뭐라고 생각했지? 잃어버린 건 찾으면 된다고. 잊어버린 건 기억해 내면 된다고. 설사 기억해 내지 못하더라도 찾기만 하면 흐지부지 무마할 수 있는 정도의 누락에 불과하다고. 아, 정말? 아, 아즈마는 지금 코아라이와 오쿠데라, 히토미로부터 잃어버린 순간을 돌려받았다. 충분히 기억을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전말을 전달받았다. 아, 그러니 이제 무마할 수 있는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말 그 정도에 불과한 기억인가? 잃어버린 것은?


갑자기 지갑 생각이 났던 것은 타당한 의식의 흐름에 이끌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갑을 잃어버리긴 했을까, 자신은?




결국 모든 것이 지갑에서 시작되었다.



오쿠데라와 코아라이가 제 안색을 살피며 무슨 고민 있으시냐고 물을 때 거짓말하지 않고도 변명할 거리가 있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지갑이 없어져서, 어디 갔나 생각하고 있었어. 일말의 거짓 하나 담기지 않은 참된 고백을 털어놓으면 아이들은, 아즈마 씨도 참, 지갑에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디 갔겠어요, 하고 한결 밝아진 표정이 되었다가, 저희도 찾아볼게요! 하고 간만에 재미 붙일 거리를 찾은 아이의 얼굴이 되어 작전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저는 작전실 안을 찾아볼게요. 히토미까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즈마도 계속 앉아 있을 도리가 없었다. 고맙다. 나도 다시 한번 찾아봐야겠는걸. 하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헛된 일이야, 소용없는 일이야, 하고 진실의 입을 주체하진 못하지만 현실의 입을 움직일 힘은 없는 자신이 머리 밖 자신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작전실 안은 이미 베일 아웃 한 날,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낸 뒤 혼자 남아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렇지만 지갑은 결국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즈마는 깨달았더랬다. 이제 자신이 작전실 안에서 지갑을 찾아낼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그것은 조금 전 아즈마가 작전실 안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지갑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전실 안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지갑을 찾아내지 못한 게 아즈마 자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작전실 안을 샅샅이 뒤지면서도 얼빠지게 찾지 못한 구석을 하나 남겨 놓고 그곳에 지갑을 두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렇다. 아니. 적어도…… 아즈마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누가?


……절도보다는 기억의 누락을 의심하는 것이 보통이라 했다. 누락된 것이 아니라면 소거법에 따라 누군가 훔쳐 간 것이 되는가. 코아라이 말대로, 지갑에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니니―그런 설정은 없으니―지갑 스스로 없어지진 않았을 테고 누군가 아즈마에게서 그것을 가져간 셈이 될 것이다. 누가? 라고, 알려주면 아즈마는 그 누군가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인지할 수 있는가? 깜박, 하고 눈을 감았다 뜬 건지 조명이 잠시 꺼졌다 켜진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실은 의식이 끊겼다 이어진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끊긴 것은 정말 의식이었나? 아직 채, 일어나지 않고 남은 자신이 침상에 남아있는 것 같다는 잔여감은 정말 착각이었나? 누군가 아직 생각해 내지 못하여. 상상해 내지 못하여. 토막 난 채로밖에 구상하지 못한 세상이. 아니고?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깜박’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한계였다. 이 모든 생각이 흘러가고 있는 동안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가늠할 수 없는, 그라는 인물의 한계.


“아즈마 씨, 밖에…….”


히토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갑을 들고서.




지갑을 돌려받았다.



아즈마 씨 지갑 같아서 가지고 왔다는 그는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서라지만 멋대로 열어 살펴본 점에 관해선 상당히 진지한 태도로 아즈마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고, 그 정도야 당연히 괜찮은 아즈마는 지갑을 찾아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함을 금치 못했다. 작전실 안에선 절대 찾지 못하리란 그의 짐작 또는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보더 어딘가에서 발견되어 이렇게 타인이 저에게 가져다주는 전개는 생각지 못했기에 그간 그의 머릿속을 오래도록 잠식했던 모든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했나 보다. 그런 망상에나 사로잡혔던 것을 보면. 그래도 입 밖으론 내지 않아 그것만은 천만다행이었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아니라 진지하게 정신 상태가 걱정될 정도였으니까. 고작 지갑 하나 칠칠찮게 흘린 정도로 그런 망상이라니. 잠깐 기억해 내지 못한 베일 아웃으로 그런 확장이라니. 거기서 지갑을 찾지 못한 채로 수상쩍은 일이 하나만 더 발생했다면 망상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커지고 부풀려져 흘러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정말 다행이었다.


손쓰기 힘들게 되기 전에 멈춰 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괜찮다면 음료라도 한잔 사겠다고 제안하자 진지하게, 그렇지만 길지 않은 시간 집중해서 고민한 그는 자판기 음료수 캔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말 걸 그랬을까?


이왕 고르는 김에 부대원들 몫도 함께 고르라는 친절에 도합 다섯 번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자판기였다. 양 옆구리에 두 개씩 네 개의 캔을 솜씨 좋게 끼워 넣고 칙, 소리와 함께 제 몫의 캔을 딴 그는 혹시 돌아가는 길에 코아라이와 오쿠데라를 아즈마보다 먼저 보게 되거든 지갑은 찾았으니 더는 찾아다니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달라는 아즈마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켜 미안한 마음에, 며칠이나 지갑을 찾아 헤맨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라며 웃는 아즈마의 웃음을 질문 하나로 멈춰 세웠다.


“며칠이요?”


그에 대답했다.


“그래, 며칠. 지갑을 잃어버린 게…….”


…….

어…….


곧바로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지갑을 돌려받으면서 아즈마는, 자신은 무엇을, 무엇을 돌려받았나? □쳐졌나? □정 되었나? □가 뭐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아즈마 씨, 하고 부름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눈을 깜박였다. 괜찮습니다. ……뭐가 말이지? 되묻는 말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웃지 않은 그가, 이코마가 고글 너머로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요. 모든 □.


……토막 난 말을 아즈마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라는 인물의 한계가 그러했기 때문이므로, 그의 탓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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