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해
- gwachaeso
- 3월 28일
- 3분 분량
<SD>
미국행 비행기를 탄 송태섭 이야기
모국어가 부재한 땅에 가기 위해선 바다를 지나야 했다. 대양은 헤엄쳐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아니기에 배든 비행기든 몸을 실을 운송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하늘을 나는 쇳덩어리와 물 위에 뜨는 쇳덩어리 중 하나를 고르라 하여, 몸에 철골이 없는 무른 인간은 날으는 쇳덩어리를 골랐다.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 상공 위에서 시속 수백 킬로미터로 활강하고 활승하는 새의 위장 속에 저희가 있으니, 일상을 벗어나는 단위에 아득해져도 놀랄 일은 아니리다. 다시 말해 울렁거렸다. 속이.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 않았으니 심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태섭은 운이 좋았다. 창가에 앉아 이륙하는 순간의 땅과 하늘을 안쪽보다 가까이서 보게 된 태섭은, 그것이 더는 문제 되지 않으리란 걸 그 순간에 바로 알게 되었다. 앞으로 10시간은 더 건너야 할 바다를 목격한 순간에. 바다를 제 발 아래 두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바다를 눈에 담은 그는 곧 그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의 어린 시절 바다는 그에 가까웠으니 계기는 전혀 갑작스럽지 않았다. 바다는 유년의 배경이었다. 아니. 바다가 곧 그의 유년이다.
어린 시절 그는 어촌에 살던 아이였다. 아버지는 어부였고, 반에는 어려서부터 낚싯대를 잡은 친구들이 그득했으며, 태섭 역시 취미는 아니어도 한 번은 낚싯대를 바다로 드리워 이름 잊은 작은 생선의 입에 걸린 갈고리를 빼낸 적이 있었다. 그는 그의 유년이 끝났을 적 그곳을 떠났다.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는 이야기도 충분히 가능한 결말을 맞았으나, 그 이야기가 태섭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시 돌아와 해변 가까이 함박 피어나 있는 꽃을 보고, 다시 올라가 절벽 안쪽에 주먹처럼 쑥 들어간 동굴에서 비를 피한 것이 태섭의 이야기. 오래전 쏟아낸 말과, 이별과, 상실에 눈물 흠뻑 쏟아낸 뒤 다시 달려가는 것이 태섭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들 하지만 저 혼자서 풍랑을 부르고 다룰 힘을 가졌다면 매해 온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올리는 제는 진작 사라졌으리란 걸 안다. 속았다고 외친 어린 날부터 한시도 가라앉지 않을 기세로 술렁이던 속이 어느 날 어느 순간 잠잠해졌음을 깨달은 날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이 쓸어 넘기는 방향대로 흔들리는 시야는 머리카락 탓이었다. 깔끄러운 바깥 거죽으로 느끼는 바람엔 울툭불툭한 바위를 갈아낼 만큼 힘이 있었고, 눈앞에서 휘모는 바람에 세상은 선상처럼 어찔했다. 대지에서 튕겨 나간 육신을 늦지 않게 받아낸 건 바다 위, 어느 해에 솟아난 섬의 바람이었다. 바다 건너 형이 있어야 할 섬. 섬은 분명 이 바다에 있었다. 태섭은 그때 분명 이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그 말은 결국 어머니를 화나게 했다. 슬퍼하게 했고, 울게 했다.
형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어린 시절엔 그런 생각을 제법 많이 했었다.
어느 날 꿈에서 그는 형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가 너무나 어린 얼굴을 하고 있어 처음엔 깜짝 놀랐고, 그다음엔 슬퍼했으며, 마지막엔 제가 기억 속 이날 실은 형의 얼굴을 보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고 눈을 깜박였다. 형은, 준섭은 그날 태섭이 아라와 함께 서 있는 땅에서 마루로 올라 어머니를 감쌌고, 이젠 제가 이 집안의 주장이 될게요. 가장이 될게요. 태섭이 볼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뒤통수. 그리고 준섭의 뒤통수라 준섭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태섭은 실로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듯이, 보지 못한 어떤 것은 빈칸처럼 그 부분만 구멍이 뻥, 또는 새하얀 공백으로 기억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는 태섭에게도 그러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날 꿈속에서 그는 준섭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분명히,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은, 이제야 제가 알았다는 사실이었다. 보지 못했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건 아니라 했지만, 알지 못하면 제대로 볼 수도 없다. 그제야 태섭은 형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보고,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알았다. 어린 시절엔 그런 생각을 제법 많이 했었다. 죄송하다고. 마침내 바다로 떠나보낸 마음에도 그리 적었다. 미안하다고. 심한 말을 해서. 보고 싶다고. 떠나지 말았으면 했다고. 그리고 지금은 다음과 같이 적어 내린다. 다음에 또 1:1 해. 이젠 지지 않을걸. 왜냐고? 우리는 이겼거든……. 최강 산왕에게서 말야……. 굉장하지? 낡은 잡지의, 끝이 구겨진 페이지가 팔락거린다. 바람에 따라. 바다를 향해.
창을 닫아달라는 승무원의 요청에 덮개를 내렸다. 바다는 더 보이지 않게 되었고, 일부 소등된 기내는 제법 어두워져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 속 얼굴도 가물거리게 되었다. 해외, 바다의 밖. 난생처음 떠나는 나라와, 나라 밖의 나라로 가는 길. 이토록 어둡고 어물거리지만, 긴장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잠을 청했다. 발아래 흐르는 물에, 흐르는 기억에, 시간에. 잠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