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 gwachaeso
- 4월 10일
- 10분 분량
<HQ!!>
오이이와
괴담 - 재능 편
날조 전개, 사망 소재
上
어릴 적 그 애가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볼을 부풀렸던 날을 떠올린다. 무슨 일 있어? 그리 물으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우물쭈물, 배구가 하고 싶어, 말하는 목소리는 조그마하기 그지없었다. 하면 되지. 아무리 눈치를 살피지 않는 나라도 바로 그리 말하지 않은 까닭이야 있었다. 지난날 저와 놀다 턱에 걸려 넘어진 아이의 오른팔에 감긴 붕대와 깁스 때문이었다.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부러진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세상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로 인해 저까지 큰일이 난 줄 알고 꺼이꺼이 곡을 했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니, 그만큼 붕대를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이전처럼 하고 싶은 배구를 마음껏 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때에 나는 위로에 재능이 없었고, 그 애는 그때 역시 섬세하고 달리 말하면 예민한 편인 아이였다. 아마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시기였을까? 하면 되지. 그리 말하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지만, 다른 말이라고 조리 있게 택하지는 못했던 나였다. 그럼에도 진지했었다. 진지하게 꺼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나였다.
“내가 할게.”
무슨 소리야?
“내가 대신 한다고.”
고개를 벌떡 들고 저를 빤히 보는 눈이 물고기처럼 동그랬더랬다. 사람 눈을 생선 눈에 비유하는 것은 실례일지도 모르나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우리의 입은 어떤 말에서든 자유롭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슬슬 깨닫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때로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들도 있으니까. 물론 그 애에게 있어선 직접 하는 것만 못할 게 분명하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 기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그러나 그 정도로 속마음을 알지 못할 사이는 아니었다고 나는 믿었다. 그 외엔 달리 방법도 없으니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을 제안했다고 생각한 나였다. 그래서 그 애가 이내 표정을 찡그리며 나를 당황하게 했을 때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하여 놀라고 말았다. 배반하지 않은 믿음대로 그 애는 내게 누구 놀리는 거냐고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애는 화를 내는 대신 침울해했다.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반문한 까닭은 그래서이다.
안 돼.
“왜?”
하지메도 하지메의 배구를 해야 한단 말이야.
나는 그 말을, 한 사람 몫으로 두 사람 몫을 다할 순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아마 그 뜻이 맞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렸던 나는 정량적인 기준을 먼저 떠올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에 관한 대답으로 내 대답이 적절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섰다.
“내 거 다 하고 네 것도 하면 되지.”
어릴 적 그 애는 순수했고, 나의 바보 같은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수긍하며 얼굴을 폈던 그 애와의 그날을 나는 기억했다. 그때 우리는 몇 살이었지? 유소년 클럽에는 들어간 후였나? 세세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명백히 기억하는 시기는 따로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졸업만을 남기고 그 애가 사고로 죽은 날. 순식간에 비어 버린 옆집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를 나는 기억했다. 어릴 적부터 이웃에, 또래, 그중에서도 동갑인 아이가 살아 같은 취미 활동을 공유할 수 있었던 행운의 수명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나를 걱정하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방으로 올라갔던 날을 기억하고, 그 애와 함께 맞춘 교복을 본 순간 그 애 없는 고교 생활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기억. 기억. 그놈의 기억.
내가 기억하는 그것은 눈물과 함께 밀려 나왔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없는 재능이 꽃피운 순간에 내가 떠올린 건 그 애였다. 내 게 아닌 센스는 내가 갈고 닦은 것과 종류를 달리했다. 그 계기에 관해 말하기 전, 그 계기를 겪기 전이었음에도 나는 그 애 없이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며 그들과 몰려다니는 순간에 그 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둔다. 그래서 나도 이따금 내게 시선을 보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 애를 찾곤 했다. 당연히 그 애를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거기 있는 거지.
너는 거기 있는 거지.
묻지 않았으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분명 웃고 있었다.
그건 분명하다.
최고 학년에서 다시 신입생으로 돌아갔다. 부족한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기회를 노리는 무수히 많은 2, 3학년들을 제치고 1학년이 당장 에이스를 맡을 수야 없었다. 그럼에도 주전으로 뽑힐 수 있었으니 축하하는 목소리가 많았고, 실력을 인정 받았으니 스스로 기뻐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한 것은 개중 그 애의 축하가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내가 주전으로 뽑혔다면 그 애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이야 그리 아쉬움을 속삭이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팀에 3학년 주전 세터가 있어 그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맞이한, 주전으로는 처음 나서는 연습 경기 날. 1세트는 선취했고 경기는 2세트에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영리한 상대 고교의 세터가 3학년 주전 세터 선배의 손에 공을 맞혔을 때였다.
“나이스 리시브!”
외침이 있었던 직후 나에게로 날아오는 공이었다. 리시브하기 어려운 공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리시브는 단번에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선배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실수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자신 없다고 시도하지 않으면 평생 이룰 수 없는 것만 늘어나는 법이기도 했다. 따라서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팔을 모아 떨어지는 공을 받을 채비를 했다. 세터가 공을 올리지 못하니 이어지는 것은 단조로운 공격, 또는 상대 네트로 공을 넘기는 것일 터. 그리할 게 분명하였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깜박였을 때였다.
할 수 있는 것 같았기에 했다는 말은 어떻게 들릴까.
퉁, 소리와 함께 토스를 올린 순간 나는 그게 정확히 에이스의 과녁에 적중할 것을 예상했다.
“윙 스파이커가 에이스에게 토스를 올렸어!”
깔끔하게 올라오지만 예기치 못한 토스에 당황했을 법도 한데, 부원들 사이에서 대포에 비유되고 했던 3학년 에이스의 스파이크는 상대방 네트 너머에 전광처럼 내리꽂혔다. 우오오오! 세트 포인트이기도 했기에 함성, 기합과 함께 팀원들의 손이 에이스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고, 그들의 손에서 풀려나기 무섭게 이번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기쁨을 표했다. 뭐야, 이와이즈미. 방금 토스 뭐야? 끝내주잖아!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나는. 웃지 못했던 것 같은데도.
현재는 이토록 기억이 불확실한데 지나간 그날의 기억만은 선연하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마치 어제와 같이 기억할 수 있는 하루를, 실은 벌써 수년 전에 지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수없이 다른 날 중 하나를 회상하며 눈을 깜박인다. 이와이즈미. 마지막에 왜 토스를 올렸지? 감독의 말에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남아있던 건 행운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내 거 다 하고 네 것도 하면 되지. 아니, 굉장히 정확하고 깔끔하더구나. 세터처럼. 내가 할게. 내가 대신 한다고. 중학교 때 윙 스파이커를 했다고 했던가? 네……. 나는 소리 없이 물었다.
이제 내 몫은 다한 거냐? 그런 거냐?
끝난 거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건 분명하다.
中
중학교 1학년 겨울, 3학년 선배의 부고를 들은 날을 기억한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비극적인 소식에 같은 학년이 아닌 반 학생들까지 여럿 울음을 터뜨렸고, 부 활동은 취소되었으며, 같은 운동부 부원 중엔 아예 학교를 결석한 학생들도 있었다. 카게야마는 죽은 학생과 안면이 있는 같은 운동부 학생이었다. 그는 앞서 말한 그들과 달리 그 모든 일에도 자기 할 일을 하던 대다수의 학생 쪽에 속했지만, 지난 1년간 그가 죽은 학생의 실력을 흠모하여 쫓아다녔던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법 많았다. 이들은 그를 찾아가 위로해주는 등 특별히 더 신경을 써주었는데, 감사했지만, 그것이 2년 후 맞이할 인간관계의 파국까지 피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정도의 효과는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직은 사이가 나쁘지 않은 그때, 함께 입부한 동기이자 같은 학년인 쿠니미가 그에게 물었다.
“갈 거야?”
이상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마치,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그러나 ‘갈 거지?’가 아니라 ‘갈 거야?’라고 물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자신이 그 말 앞에 붙은 ‘오늘’이란 단어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갈 거야?’ 이 말은 이제 이상하지 않다. 그는 대답했다.
“응.”
어른 중에는 너무 어린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 저어하며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확실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카게야마였다. 그 역시 아직 어른이 되려면 먼 아이였지만,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어린 사람의 영정을 마주하는 것은 그에게 정말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카게야마만이 느낀 다른 것도 있었다. 일찍이 살아생전 그리했으므로 죽어사후라고 다르지는 않을 터인 어떠한 의지에, 그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은 까닭은 한때 그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 된 적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거기 있나요.
나를 보지 않나요.
그렇군요.
외면당하는 것이야 익숙했다. 어린 카게야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신에 다시 발을 꿰었다. 겨울, 부고를 들은 날은 그렇게 기억된다.
3:3 연습 경기를 마친 후 잡힌 타교와의 연습 경기, 대상은 현 내 4강으로 일컬어지는 아오바조사이 고교였다. 배구부 담당 교사인 타케다로부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들은 그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이들이었다. 강호와의 연습 경기로 흥분한 히나타의 반응을 옆으로 미뤄두면, 주장인 사와무라와 스가와라가 무겁지 않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귀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거기, 꽤 특이한 에이스가 있다고 들었어. 주장이라던데. 윙 스파이커인데 서브, 세팅, 토스 올리는 솜씨가 세터 못지않다고. 중학교 때 세터 포지션이었던 거 아냐? 귀는 의식해서 쉬이 움직일 수 있는 신체 일부가 아닌데, 그들이 그들 대화에 쫑긋 세운 귀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카게야마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정황상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카게야마. 그러고 보니 아오바조사이 고교는 키타가와 제1중 학생들이 많이 진학하는 학교라고 들었는데. 혹시.
“아는 게 있어?”
시기상으로 따지면 3학년은 1학년들의 2년 선배이므로 1년은 함께 학교에 다녔을 것이란 추측은 타당했다. 또한 정답이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아는 게 없었다. 정말로 아는 게 없었다. 배구 외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성정이라, 함께 배구를 한 사람 자체에 관한 정보까지 기억에서 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인연보다 더욱더 선명하게 기억하는바. 그럼에도 카게야마의 회상에서 환기된 인물 중 그들의 설명에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에이스라면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하다만.
“아니요.”
굳이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아도 그 실력이 세터와 비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세팅 같은 능력이. 그러므로 카게야마가 아는 자 중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그 사람은 그곳에 없으니 처음부터 후보군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게야마의 대답은 ‘아니요’. 따라서 제가 처음 보는 사람을 그곳에서 마주하리라 생각한 카게야마의 추측은 합리적이었다. 세터만큼이나 세팅 실력이 훌륭한 윙 스파이커. 그 설명에 어떤 사람을 예상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를 박하게 평가했다고 야유하면 억울했다. 그는 중학 시절 세팅에 관해선 재능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주력으로 내세우는 장기도, 갈고 닦은 센스의 대상도 그것이 아니었다.
“진짜 카게야마네.”
그러나 사와무라와 주장 악수를 하는 그는 카게야마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 나이스 서브!”
그러나 그의 기술은 카게야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술이다.
과연?
정말?
진짜로?
“야, 카게야마. 저 사람 너보다 더 강력한 살인 서브를 넣는데!?”
“…….”
긴장을 떨치지 못한 히나타가 연발한 실수로 1세트는 제대로 말아먹었다. 그런 1세트를 제물로 삼아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는 2세트, 코트를 교체하는 중 다가온 히나타는 히익, 비명을 지르며 카게야마에게 속닥거렸다. 표적으로 지목된 츠키시마도 과히 좋지 못한 표정으로 카게야마가 서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날따라 평소보다 말수가 준 상태였다. 카게야마의 중학교 선배면 키타가와 제1중 출신이겠고. 대신 입을 여는 것은 사와무라. 어쩐지 카게야마와 폼이 비슷한 것 같은데. 스가와라의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카게야마는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응? 블로킹도, 서브도. 저 사람을 보고 배우진 않았어요.
“그럼……”
저 사람은 아니었다. 저 사람은. 그렇다면.
누구야, 당신은?
카게야마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下
시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의 해는 건물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 같은 감상은 교문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만 이어졌으므로 그리 길게 이어졌다고 보긴 어려웠다. 교문 앞엔 카게야마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카게야마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에 기댔던 등을 뗐다. 안 그래도 흰색 저지인데 때가 타는 걸 걱정하지 않는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지난날을 회고하는 사이, 그는 카게야마가 아닌 사와무라에게 말을 걸었다. 앞장서서 걷다 가장 가까이서 발을 멈춘 사와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와이즈미의 말을 들었다. 괜찮다면.
“잠깐 카게야마와 이야기를 해도 될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들은 타케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왔으므로 양해를 구하고 빌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와이즈미가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사와무라는 카게야마에게로 고개를 돌린 뒤, 고개를 끄덕이는 후배에 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앙?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1학년에게……! 타나카. 가장 시끄러운 녀석의 입이 엔노시타의 손으로 헙, 틀어 막혀 끌려 나가자 나머지는 자연히, 그리고 조용히 주장을 따라가길 택했다. 히나타야 저도 따라가 얘기를 듣고 싶다는 티를 숨기지 못했지만, 주장을 거스를 만큼의 용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한결 풀어진 눈으로 웃어 보였다. 가자, 히나타. 넵! 아니, 혼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앞서 시미즈에게 응원을 부탁했던 것도 그렇고 오늘따라 이래저래 미안한 게 많다고 느끼는 사와무라였다.
그 사이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에게 묻고 싶은 많은 것 중 입 밖으로 꺼낼 것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배구에 한해서라면 궁금한 걸 참아두는 일 따위 없는 그로선 꽤 의외였다. 줄줄 쏟아내어 상대를 기겁하게 하면 또 모를까. 저는 생각보다 그를 어렵게 느꼈던 걸까? 회상하면 그건 또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먼저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와무라가 주위를 물린 덕에 조용해진 자리에서,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가 제가 먼저 묻길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자리를 만든 건 이와이즈미였지만, 결국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카게야마의 질문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일 터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렇다고 카게야마의 언변과 화술이 봐 줄 만한 수준이라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기술, 세팅. 서브. 물론 카게야마가 무얼 말하려는지는 알기 어렵지 않았다. 카게야마 역시 정돈된 언어로 다시 한번 제 질문을 보충하려 한 듯했지만, 아쉽게도 이와이즈미가 좀 더 빨라 이는 다음 기회로 넘겨야만 했다. 카게야마가 대뜸 내뱉은 질문으로 도리어 긴장을 던 이와이즈미가 가볍지만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재능이 있었나 봐.”
거짓말.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와이즈미 자신의 것이었다. 등 뒤에서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건 다른 이의 것이었다. 아주 신났다 이거지, 오늘 시합에서 이겨서. 답을 아는 질문이었으므로 그가 누군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와이즈미는 그를 조금은 골릴 수 있겠다 생각하며, 그러나 카게야마에게 들리기로는 지극히 담담하고 조금은 적적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게야마. 그래서 말인데, 만약 필요하다면 말이야.
“데려갈래?”
그 말에 시선에 엮인 웃음도 그치고 지난가을에 떨어지고도 아직도 다 치우지 못한 낙엽을 휩쓰는 바람도 그쳤다. 다물어져 있던 카게야마의 입술도 조금 벌어졌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이와이즈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배구는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쯤 하면 제 몫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이즈미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진로를 잡아둔 상태였고, 목표로 마음에 둔 전공도 이미 있었다. 운동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수로 활동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올해가 마지막. 이와이즈미의 꿈이 그 애의 꿈과 일치하는 날도 올해가 저물면 함께 끝났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과연 자신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말이 돼? 그 애가 배구를 그만두는 게. 그만두는 건 자신이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카게야마에게 내뱉고 만 질문은 더없이 충동적이면서도 실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질문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그는 몇 번이고 그 말을 소리 없이 준비하며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 전에 뭐? 이와이즈미는 어리석지 않으며 이기적이지도 못 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잘못을 깨닫기 무섭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입을 열어 말을 멈췄다. 또는 바꿨다. 미안. 가장 먼저 사과를 입에 담았다.
“내가 헛소리했지. 미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
“아뇨.”
이와이즈미의 최초의 실언은 가져갈 것이냐고 물었어야 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대답이 친절에서 일컬어진 부정이 아니라 앞서 한 질문의 거절임을 알아차렸다. 왜. 그런데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왜?
왜?
그 애는 살아 재능을 질투하고, 죽어 제 곁으로 와 재능으로 추상되었다. 아이러니했다. 이와이즈미는 지난 2년간 제가 들은 ‘재능 있다’는 소리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도 알고 있듯이, 아니,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로, 실은 다른 이가 노력으로 쌓아 올린 시간을 거저 얻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래도 듣기엔 나쁘지 않은 소리였다. 공으로 얻은 경험, 시간. 필요 없는 건 아닐 텐데. 가치 없을 리는 없을 텐데. 그 애의 짧은 생이. 그 애의 존재가.
그 애가.
그러나 이윽고 카게야마가 입을 열고 대답한 순간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문장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뜸을 들이지는 아니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것이었고 귀에 닿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설명했다. 또는 해명했다. 석명했다.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이와이즈미는 그 순간 바로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가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그 애를 이해한단 말인가.
“절 좋아하신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싫어하실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아요.”
코트 밖에서는. ……그래.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떨어뜨리듯 끄덕였다. 벗어나는 건 그 혼자, 스스로여야 했다. 멈춰야 하는 것 역시 저희이듯이. 미안. 아뇨. 이번엔 확실히 부정이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착한 아이였고, 이와이즈미는 그 사실을 알았고, 쓴웃음으로 드러나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사과를 거듭했다. 미안. 그해 인터하이에서 아오바조사이 고교는 카라스노 고교를 꺾고 시라토리자와 학원에게 패배했다. 봄철 대회에선 예선 준결승에서 카라스노 고교에게 패배하였으며, 예선전이 끝난 후 이와이즈미는 배구를 그만두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기에 그가 배구부를 은퇴한 날 꿈에 이제는 까마득하게 어린 한 아이가 나와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음을 아는 자는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다만 그 애를 끌어안고 달랠 뿐이었는데, 이와이즈미의 품에서 그 애는 무럭무럭 자라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의, 그러나 이와이즈미보다는 여전히 작은 키를 가진 때의 그 애가 되었더랬다. 그 애는 그들의 봄철 대회가 끝난 날 밤에 그 애가 있었으면 지었을 것 같은 표정으로 섧게 울며 좀처럼 그치지 못했다. 그래도 간혹 코를 삼키는 와중에 들리는 문장들이 몇 개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주워들었다. 미워. 미안. 약속했잖아. 미안. 대신하기로 했잖아. 맞아. 그래도 더는 안돼. 다정함과 엄격함, 그건 그가 가진 많은 좋은 면 중 가장 좋은 면이기도 했다.
“미안.”
그리고 그 애는 그가 가졌던 것 중 가장 좋은 것이었다.
꿈이 저물고 이와이즈미가 다시 그 애를 보는 날은 없었다. 시선을 느끼는 날도, 공을 다른 이에게 올리는 일도 없었다. 구르는 공을 주워 건넨 적은 있어도 스파이크를 내리치는 날은 없었다. 그렇게 그가 한때 배구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서 잊혀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불만을 가지지 않으니, 재능은 본디 시작을 이끌어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는 법이고 이후는 자신의 노력에 달리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었다.
그게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