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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 gwachaeso
  • 3월 20일
  • 3분 분량

<WT>

SF 미와와 아즈마 이야기

잔인함, 폭력성, 뭔 근본 없는 이야기 주의



슈지. 무겁지 않니. 그것은 잘린 목을 끌어안고 달리는 소년의 귀에는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왜냐하면, 목이잖은가.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은 모두 절단되어 더는 숨 들지 않는 관 사이로 소리가 나올 리는 만무했기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들릴 수 없는 소리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건 알지만 들릴 수 없는 소리는 들리는 것 같다는 허황한 생각을 하며 달리는 소년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고, 그중에서도 처음엔 분명 그 색이 희었던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배에 달라붙으니, 마치 어딘가 후비어 헤집어진 듯한 모양새로 얼룩덜룩한 꼴이 된 소년의 배였다. 소년은. 붉은색이었으면 분명 오해하는 이가 생기련만 검은 기름이 엉겨 붙은 것인지라 뭔가, 기계류 같은 것에서 터져 나온 기름을 셔츠로 받아낸 것 같은 꼴을 한 채 여전히, 지금도 달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왜 의체를 개발한 최초의 과학자들은 그 안에 들어가 기기를 작동하는 트리온 유(油)의 색을 검게 내버려두었을까? 마치 타르처럼. 폐에 엉겨 붙는 담뱃재 속 타르처럼 검고도 끈적하게. 실제론 그냥 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다. 굳이 건들 필요가 없기에 그렇게, 검게 둔 것뿐이리다. 실제로, 검은색 외에 무슨 색이었으면 했냐고 질문받으면 대답할 말이 궁했다. 무언갈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뿐이라.


그런 질문을 소년에게 던질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었다. 잘린 목의 단면에선 이제 스파크도 튀지 않았다. 이건 좋은 일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손쓸 수 없이 끝났다는 뜻이 되는가. 알 수 없이, 안고 달리는 소년의 다리는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오래전에는 그러지 못했던 것을 이제 와 그리하고 있었다. 그때도 소년은 죽은 누이를 업고 달려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업고 달린다고 하여 살아날 누이가 아니었지만 그런다 한들 달리고 업어야 했을 누이였고, 자신이었고, 앞으로 영원토록 함께할 지난날의 후회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는 잘린 목을 끌어안고 달리고 있었다. 살릴 수 있든, 살릴 수 없든, 여부는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소년은 달려야 했다. 언제까지든. 어디까지든. 그를 위하여. 품에 안은 잘린 목을 위하여.


일찍이 그는 소년이 아는 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가 신체의 90% 이상을 의체로 갈아치우게 된 시점은 소년이 누이를 잃었던 해와 동일한 1차 대침공이 있었던 해, 그리고 달이었다. 고작 스물한 살에 앞으로 남은 모든 생애에 엔지니어의 조정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대학의 재자는 재활을 마치자마자 보더에 입대했고, 마찬가지로 장례를 마치자마자 보더에 입대한 소년과 같은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윽고 그가 부대장의 직함을 받았을 땐 그 아래 소속된 대원이 되었다. 그 아래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익혔다. 그는 소년을 구해주고 소년을 배신한 이와는 달랐다. 증오를 긍정하는 법. 싸우는 법, 전략을 세우는 법. 가르쳐준 것이, 가르침 받은 것이 한가득하다. 언젠가 한 번은 네이버의 폭격 속에서 물러서지 않던 소년을 직접 둘러업고 자리를 빠져나와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소년은 그때처럼 화난 그를 이후론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멀리서 적을 공격하는 저격수인데도. 잘린 목을 끌어안고 달리는 이유에는 이토록 많은 이유가 있었다. 당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는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니.


버리고 가도 된다. 방해되잖니.


그것은 소년의 귀에는 닿지 않는 소리다. 귀로는 듣지 않는 소리다. “하지만 아즈마 씨.” 그 대신 입을 열어 이런 말을 기어이 내뱉고 만다. 쉬지 않고 달린 탓에 헉헉대는 소년의 입은 숨을 몰아쉬기에도 바쁘건만 소년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짜로 내가 당신을 버리고 가길 원하셨다면.”


“버리고 가라, 고 하셨을 겁니다.”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길 사람인가? 그는 소년이 아는 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이는 그가 인격자라는 의미로 하는 소리도 맞지만, 인간답게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었다는 의미도 되었다. 아, 그는 실로 욕망에 충실하였다. 살고자 하는 방식에 타협하지 않았다. 살고 싶은 방향이 있다면 그 방향대로 살아야 했다. 사는 데 뜻이 있다면 그 뜻대로 살아야 했다. 왜? 그 자신이 그걸 바라니까. 바람은 언제나 강력한 동기였다. 삶을 사랑하는 데 그 만큼,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보기 드물었으니, 그는.


무거웠다.


무겁지만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출처를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이야기다. 사랑에 눈멀어 어머니의 심장을 뽑아낸 청년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서 피를 흘리자, 청년의 손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구른 어머니의 심장이 청년에게 ‘괜찮니? 다치지 않았니?’라고 물었다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것은 소년이 베어낸 머리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말 아닌가? 복수에 눈멀어 마구잡이로 휘두른 칼에 정녕 베이지 않은 머리란 말인가? 아니라고 말해줘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은 모두 절단되어 더는 숨 들지 않는 관 사이로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어떤 머리가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그것을 주워 담는 소년이다.


주워 담을 수 없는 시간에 비하면 이 얼마나 쉽게 거둘 수 있는 머리란 말인가.


소년은 이제 살려주세요,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아즈마 씨가 죽을 것 같아요,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알 게 뭐야. 너 알아서 해. 남에게 도움 청하지 말고, 너 스스로. 나 스스로. 그럼 되는 것이다. 그럼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일도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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